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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노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32)제1부 독립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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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41년6월22일 히틀러가 돌연 소련국경을 돌파해 맹진격을 시작했다. 일본정계와 군부도 크게 긴장해 대병력을 만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내가 7월 여름 방학 때 부산에 도착하니 부산역 부근은 일본군대로 가득 차 있었고 서울로 가는 기차는 민간인은 타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독군사동맹으로 일본군이 곧 소련국경으로 침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9월 새학기가 시작돼 동경에 돌아와서도 소만국경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뜻밖에도 대학에서는 우리의 졸업을 3개월 앞당겨 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일본이 소련이 아닌 미국과 새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을 느꼈다.
졸업이 가까워오니 같이 다니는 조선학생들은 만나면 취직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취직에는 흥미가 없었다. 취직을 하지 않고 조선에 돌아가서 직업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동경에 남아 조선을 왕래하며 지하운동을 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 조선에 돌아가 지하조직을 조직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남아 공부도 좀 더하고 시기를 관망하려고 집에 편지를 했더니 『이 이상 너 학비를 대줄 수 없으니 조선에 돌아와서 취직하라』는 회답이었다. 그때 대학신둔학 강사가 중외상업신보(일본경제신문의 전신)의 주필 오바마(소정)였다. 그 신문사의 부장으로 하리후(침생) 라는 대학선배가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나를 자기 집 식사에 초청했다.
그 집에서 술을 마시며 『조선에 돌아가면 시국에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어 지금 망설이고 있다』고 나의 입장을 대강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시국이 돌아가는 정보를 제일 잘 알 수 있는 곳이 신문사이니 신문사에 취직시험을 쳐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조일신문에 시험을 쳤다.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2차시험은 면접시험인데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면접시험은 벙어리가 아니면 다 합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합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였다. 나는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12월8일 졸업시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학앞 버스정류장에 서있는데 「일본군이 오늘 새벽에 하와이를 폭격했다」는 라디오방송이 들려왔다.
이 전쟁덕분에 우리는 3개월 앞당겨 1941년12월25일에 졸업했다.
그때 같이 졸업한 조선학생은 제일고등학원 때부터 같이 다니던 하태 김두희(전서울대경제학교수) 제2고등학원 출신의 이동욱(전동아일보사장) 김용갑(전장면내각재무부차관) 보성전문학교를 마치고온 김상기(전동아일보회장)등이 있다.
1942년 신년휴가가 끝난 후 나는 중외상업신보 주필 오바마의 주선으로 동경주식 취인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고싶어서 간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개전직후부터 일본군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가는 폭등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왕지사 입사했으니 일본자본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도서실에 들어가 보고 나는 놀랐다.
중국공산군 점령하의 행정제도, 경제제도, 금융정책, 그리고 소련의 경제 및 경제지리 등 비공개연구조사서적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3개월 걸려 다 읽었다. 소련경제와 중국공산군점령하의 경제상황에 대해서는 최신의 지식을 얻게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맹통신 (현 공동통신의 전신으로 일본의 국책통신사)의 정보로 유고슬라비아에서 티토가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나도 조선에 돌아가서 티토와 같이 유격전을 전개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장 동경주식취인소를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내 머리 속에는 티토 밖에 없었다.
진주 집에 돌아간 것이 4월15일게 였다. 곧 조선지도를 펼쳐놓고 어디어디에 유격근거지를 두느냐하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4월18일 미공군이 동경을 폭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퍼뜩 눈이 뜨였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집에 온 지 닷새도 안 돼 서울 간다하고 곧 부산으로 가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갔다.
동경에 가는 도중 유명한 삼조온천에 내려 하루 쉬었는데 온천장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공군의 동경 첫 공습은 일본국민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 확실했다.
이 공습은 물질적 피해보다 일본국민정신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나는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진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조선지도를 펼쳐놓고 유격전 도상작전에 정신을 쏟았다. 우리 손으로 조선에 와있는 일본군과 반드시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정신적 해방이 될 수 있고 또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진주는 좁은 곳이라 내가 와 있다는 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이 찾아오고 우리 집 근처에 형사가 자주 보였다. 나는 곧 서울로 떴다. 여운형을 찾으려 하니 그는 이미 헌병대에 끌려간 뒤였다.
서울의 정세도 전과 달리 더욱더 삼엄해가고 일본식민지 통치자들은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을 거의 다 전쟁협력에 내몰고 있었다.
서울에 온지 며칠 안 돼 진주집에서 형사가 나를 만나자고 찾아왔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서울에 있는 것도 위험을 느껴 일본공무원 복장에다 가짜신분증명서를 가지고 유격근거지의 실지답사에 나섰다.
서울에서 가까운 양평의 용문산으로부터 황해도 구월산, 평안도 묘향산, 그리고 신의주와 함경도 회령까지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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