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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왜 김정은을 칭찬했을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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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긍정적인 면모를 강조한 건 상당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최근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솔직하고 의욕적이며 강한 결단력을 보여줬다”고 묘사하면서 “후손들에게 핵무기라는 짐을 지우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었다.

선거 전략인가, 영리한 외교술인가 #평화 위한 실용적 기대 표현했어야

한·미의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이 평가가 놀라우리만치 긍정적인 해석으로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이 누구보다 김 위원장과 긴 시간을 보내긴 했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들은 김 위원장의 플랜을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 그는 지난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를 지시했고, 탄도미사일과 핵 능력을 확장해 왔다. 무엇보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제기한 반인륜 범죄를 일삼은 억압 정권의 수장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했다는 말도 북한 정권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거의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후손들에게 핵무기라는 짐’이란 발언은 김일성이 핵 개발을 시작할 때 했던 말과 거의 같다. ‘조선반도 비핵화’를 공언하며 김정일은 우라늄 농축시설을 가동했고, 김정은은 노동당 규약에 핵보유국을 명시했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네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평화를 위한 실용적 행보=문 대통령은 영리하게도 평창 겨울 올림픽에 북한이 고위급 대표단을 보내도록 초청했고, 이걸 통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대화를 중재할 수 있었다. 핵 능력에서 북한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그 이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핵실험을 실시한 적이 없고 한반도의 충돌 위험도 줄었다. 북한이 실험을 재개하면 긴장이 고조될 수 있는 만큼 김 위원장을 달래가며 북·미 대화의 여지를 열어 두는 게 낫다고 봤을 수 있다. 문제는 바이든은 트럼프가 아니란 점이다. 그렇다면 왜 김 위원장을 야단스럽게 칭찬했을까.

②선거를 위한 정치적 움직임=일련의 스캔들과 코로나 백신 보급 부진 등으로 문 대통령과 여권엔 핵심 지지층만 남았다. 대선 승리를 위해선 지지층을 확장해야 하는데, 중도층이 문 대통령이 2018년 전쟁 위기를 넘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믿을 수 있다. 이 설명엔 그러나 허점이 있다. 독재자의 호의에 기대는 건 대단히 위험한 정치 전략이란 점에서다. 대선 전에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핵 실험을 재개할 경우 여당은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물론 청와대가 어떻게 해서든 평양이 선거를 망치지 않도록 애쓰겠지만(charm) 말이다.

③정치적 유산을 위한 망상적 노력=상당수 전문가는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대해 그야말로 망상(妄想·delusional)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또 진보 인사들의 DNA엔 자신들에게 발림말하는 스탈린주의 독재자들을 신뢰하도록 하는 뭔가가 있다고도 여긴다. 문 대통령이 북한에서 연설할 때 15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환호했는데, 민주화·통일 운동의 경험 탓에 문 대통령과 진보 인사들은 이들이 자유의지가 있는 시민이 아닌 로봇(automaton)에 가깝다는 걸 보지 못한 채 북한이 변화하고 있고 ‘평화를 강력하게 염원하고 있다’고 믿어버린 것은 아닐까. 김 위원장이 이들에게 통일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해도 이들은 버릴 것이다.

④문 대통령이 옳은 경우=북한의 현재 행보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김 위원장이 사석에서 설득력 있게 뭔가를 얘기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역사나 증거에 반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그러나 북한의 참혹한 인권유린 실태와 무력 증강, 명백히 기만적 발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김 위원장의 성품에 큰 희망을 걸지 말고, 평화를 위한 실용적 기대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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