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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준석, 게임 체인저가 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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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동교동계 노(老)정객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평생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주군으로 모셨던 그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다. “호남에서도 이준석 대표에게 호감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이대로 가면 대선에서 국민의힘 찍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 같다”는 거였다. 여론조사(YTN·리얼미터)에서 국민의힘 호남 지지율이 두 자릿수(14.8%)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나온 참이었다.

“정치적 언어 구사 탁월” 호평 #기득권 나눠갖는 카르텔 정치 #발전 막는 낡은 4류정치 끝내고 #정치·사회 변혁 역할 자임하길

호남 원로의 촌평에서 36세 야당 당수의 등장이 몰고 온 변화를 체감한다. 노정객은 야당에 불리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소신을 밝히는 배짱, 까다로운 이슈도 회피하지 않는 당당하고 명쾌한 발언을 높이 샀다. 여론조사 전문가는 “소신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에게 반감을 가졌던 사람을 포용하는 느낌이 들도록, 지혜롭게 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허진재 한국갤럽 이사)고 했다. “정치적 언어 구사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는 정치권 평가와 비슷하다.

근래 그는 “다시는 우리 당에서 광주시민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폄훼를 정치적 수단으로 쓰지 않는 문화를 만들겠다” “보수세력이 김구 주석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데 소홀함이 있었다면 잘못”이라는 발언을 잇달아 쏟아냈다.

듣기 좋은 말 골라 하는 사탕발림이나 막힌 곳 뚫는 사이다 발언은 아니다. 그런데도 울림은 컸다. 그의 언어가 진실되게 들리는 건 고해성사에 가까운 자기 고백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저를 영입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감사하다. 그렇지만 탄핵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하지 않겠다.”  보수 야당 정치인에겐 힘든, 그러나 국민들은 듣고 싶어하는 말을, 보수의 심장 대구에서 툭 꺼내 던질 수 있는 용기와 실천이 그를 강력한 영향력을 발신하는 ‘메신저’로 만들었다. 정치공학과 유불리에 주판알 튕기는 기성 정치와 오버랩될 때 이 파격의 효과는 더 극대화된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무릎 사과에 이어 이 대표의 대구 탄핵 발언으로 국민의힘은 어둡고 험난했던 ‘탄핵의 강’을 마침내 건널 수 있게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4년여 ‘탄핵세력’이라는 포승줄에 묶여 꼼짝달싹 못했던 적폐 프레임의 위력이 이제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다.

‘36세, 0선의 제1야당 대표’는 그간 경험하지 못한 낯선 현실이다. 이 대표가 헤쳐가야 할 엄중한 시대적 과제가 여기에 녹아있다. 권위주의 세력과 운동권 세력이 양분해온 정치권력과 여기서 파생된 정치 문법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국민을 병들게 하고 국가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4류의 낡은 정치를 끝낼 게임 체인저가 되라는 요청 말이다.

‘제도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던 1987년 체제 이래 정권이 일곱 번 바뀌었지만 정치는 오히려 저급해졌다. 국민 다수의 공적 이익에 봉사하는 정치가 아니라 과점화된 정치권력의 기득권을 나눠 갖는 카르텔 정치로 변질됐다. 국민이 아니라 진영의 이익에 봉사하며, 집단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매표 정치도 서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낡은 정치를 허물어뜨릴 게임 체인저의 출현이 절박해진 것이다.

이준석 대표가 지하철과 따릉이를 타고 출근한 게 화제가 됐다. 미국·영국·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선 차 없는 의원,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의원들이 수두룩한데 우리 눈엔 지하철 타는 당 대표가 신기하게 보인다. 국민 대다수가 지하철·버스등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게 일상인데 말이다. 정치인에 대한 과도한 특권이 당연시되면서 주권자의 근육과 의식을 마비시켜버린 탓이다. 이 대표는 평소 지하철을 즐겨 이용한다고 한다. 앞으로도 불가피한 공적 업무를 제외한 사적 모임과 출퇴근 시엔 지하철과 따릉이 이용을 계속했으면 좋겠다. 국민의 평균적인 삶과 유리되지 않는 청년 대표의 일상이 여야 정치권의 뉴노멀로 자리 잡는 걸 보고싶다.

어제 8강전을 끝낸 국민의힘 대변인단 선발 토론배틀 ‘나는 국대다’ 의 흥행몰이는 정권교체와 정치 교체에 대한 염원이 반영된 본보기다. 4명의 대변인단을 뽑는 배틀에 560명이 지원했고, 유튜브 조회 300만뷰를 넘긴 것도 그렇지만, 25살 대학생의 청와대 청년비서관 영입 이벤트와 대비되면서 지난 4년여동안 보여주기식 쇼로 일관해온 ‘쇼통 정부’의 실체가 죄다 드러났다. 만약 이번 토론 배틀이 성공한다면, 내용보다는 쇼윈도 장식에 치중하는 철학 부재와 상상력 빈곤의 낡은 정치에 대한 통렬한 반격이 될 것이다.

이준석 대표는 ‘청년을 위한 정치’의 영역에 머물지 말고 과녁을 넓힐 필요가 있다.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넘어 정치·사회 변혁에 대한 게임 체인저의 역할을 자임하길 바란다.

‘세상을 더 멋지고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불가능해보이는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했다. 불가능을 꿈꿔야 판을 바꿀 수 있다.

이정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