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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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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1944년 7월 7일. 이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충칭을 찾아가는 대륙 횡단을 위해 중국 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6000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장준하, 『돌베개』)

중국 쉬저우(徐州)의 일본군 ‘쓰카다 부대’ 탈영 일의 심경을 장준하 선생은 이처럼 비장하게 묘사했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일본도로 목을 치겠다”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감행하던 길이었으니 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처럼 끌려온 조선인 학도병 3명과 함께 사선(死線)을 넘었다.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이별한 부인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는 편지를 보낸 직후였다.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훗날 고려대 총장이 되는 김준엽 선생을 비롯해 중국 각지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수십명의 조선 청년들이 그들을 반겨 맞았다. ‘젊은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각오 아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까지 6000리(2356㎞) 길을 내처 걸었다. 그곳에서 광복군으로, 군사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의 그 날만 기다리던 그들은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에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조선 청년의 기개는 두고두고 독립운동사의 찬란한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그때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윤경빈·김우전 선생은 뒷날 광복회장이 됐다.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 및 후손들이 결성한 이 단체를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적임자들이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역대 광복회장들은 거의 모두가 조국 독립에 청춘을 바친 투사들이었다. 초대 회장인 이갑성 선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다. 광복군 경력을 지닌 이들이 즐비했고, 어쩌면 피의 온도가 더 뜨거웠을지 모를 ‘의열단’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 고인이 된 그 어르신들이 자격 요건에 의문이 제기될 뿐 아니라 행보 하나하나가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급기야 ‘똥물’ 세례까지 받을 뻔한 지금의 광복회장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광복회에 새로운 광복이 필요해 보인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