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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베르디의 ‘가면무도회’서 만나는 표현주의 미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오페라, 미술을 만나다(9)

베르디가 1859년에 초연한 ‘가면 무도회’는 1792년에 일어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의 암살 사건을 소재로 작곡한 작품입니다. 그는 만25세에 왕이 되었고, 가면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암살당한 계몽군주입니다. 그는 계몽사상가와 교류하면서 지성을 넓히고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언론 자유의 보장과 빈민구제법 등의 정책을 추진하다가 그의 개혁 정치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게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오페라 속에서 스웨덴의 왕인 구스타보는 아멜리아를 사랑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국왕의 친구이자 충성스런 신하인 레나토의 부인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왕이 아닌, 한 인간의 가슴 저린 비극이 기다리는 오페라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막이 오르면, 사랑에 빠진 왕이 아멜리아를 그리며 환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점도 봐주는 주술사에 대한 시종의 이야기에 왕도 호기심이 발동해 함께 가보자고 합니다. 주술사의 동굴에 도착한 왕은 어부로 변장하고 항구에서 작별한 여인이 변하지 않을지를 알려달라며 주술사에게 손을 내밉니다.

손금을 본 주술사는 깜짝 놀라며 "이후 처음 악수를 하는 자의 손에 죽게 될 운명"이라고 털어놓지요. 어처구니없는 예언이니 누구든 자신과 악수를 하며 비웃자고 하며 신하들에게 손을 내밀지만, 아무도 왕의 손을 잡지는 못합니다. 이때 레나토가 뒤늦게 들어오는데, 상황을 모르는 그는 반갑게 내미는 왕의 손을 덥석 잡고 악수합니다. 그가 왕의 친구이자 충신임을 아는 모든 사람은 주술사의 예언이 틀렸다고 웃고 말지요.

도시 외곽의 달빛 창백한 곳에 아멜리아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남편의 친구를 사모하게 된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흐느끼듯 부른답니다. 구스타보가 그녀를 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질까 두려워 그와 거리를 둡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목숨도 바칠 친구, 그 사람의 아내예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억지로 본심을 감추지요. 그런 그녀에게 구스타보는 힘겹게 부탁을 합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달라며 간청하는 왕에게 결국 그녀는 “그래요, 당신을 사랑해요!”라며 흐느낍니다.

그녀의 사랑을 확인한 구스타보는 가슴 터지는 기쁨에 젖어 “이 순간, 죄책감도 우정도 내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리. 사랑의 빛을 내게 비춰주오”라고 외칩니다. 그때 레나토가 왕을 찾아옵니다. 놀란 아멜리아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왕은 그녀를 시내로 데려다주되 얼굴을 보지도 말을 걸지도 말라고 지시합니다. 허나 도중에 다른 귀족과 실랑이 끝에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지요. 다른 귀족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충성을 바친 레나토를 조롱하고,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암살을 계획합니다.

구스타보는 아멜리아의 사랑을 확인한 것에 만족하며 그녀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레나토를 외국 대사로 임명해 부부가 같이 떠나도록 임명장을 작성합니다. 그렇게 왕은 그녀를 지키고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을 간직하려 한 것이지요.

암살 당해 쓰러진 스웨덴 국왕 구스타보 3세. [사진 국립오페라단]

암살 당해 쓰러진 스웨덴 국왕 구스타보 3세. [사진 국립오페라단]

무도회가 열리고, 왕의 암살 기도를 안 아멜리아는 왕에게 속히 자리를 피하라고 재촉합니다. 구스타보는 그녀의 사랑을 알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미소를 머금지요. 두 사람이 마지막 인사를 정중하게 나누는 그 순간, 뒤에서 다가온 레나토가 왕의 가슴을 찌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구스타보는 가슴에서 외국대사 임명장을 꺼내 레나토에게 건넵니다. 그렇게 왕의 마지막 권한으로 그를 사면하고, 모든 이들의 장엄한 애도 합창 속에 숨을 거둡니다.

오페라 속 무도회에서 구스타보의 가면은 그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도 사용했던 가면은 마치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서처럼 가면 속 인물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제거하고 판단하게 하지요. 하지만 가면의 본래 목적은 정체를 숨기거나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사악한 마음을 선한 얼굴의 가면으로, 증오의 복수심을 호감의 미소로, 비아냥이나 얕봄을 존경스런 듯한 표정으로 덮어버립니다. 본심을 감추고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꾸미는 거지요.

인간의 이런 위선과 인간 심연의 본성을 풍자하며 가면을 그린 화가가 있습니다. 벨기에의 표현주의 화가 앙소르(1860~1949)는 잠시 왕립아카데미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나 전통적인 교육방식에 적응하지 못했고, 풍자적이고 공격적이며 우울한 자신을 그림에 드러냅니다.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사회와 기득권층을 비판하기도 했구요. 이렇게 본인의 깊은 내면을 자유로운 구성과 색채로 다소 과격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함을 그림에 표현해 갑니다.

앙소르의 대표작, '음모'. (1890)

앙소르의 대표작, '음모'. (1890)

스스로 ‘장르를 초월한 화가’라 한 그는 10여년간 오싹하고 기괴한 가면과 해골을 그리며, 사람들의 깊은 내면 특히 군중의 심리 표현에 몰두합니다. 그는 붓을 마치 창처럼 휘두르는 듯한 모습을 그리기도 했는데요, 그에게 가면은 대상의 본질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지요. 불안, 환상 같은 화가 자신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구요.

평생 화단과 대중의 조롱을 받던 그는 점차 인정을 받았고, 70이 되어서는 남작 작위까지 받게 된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화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후학을 양성하지도 않았답니다. 독보적인 장르를 개척한 아웃사이더였지요.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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