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대권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돈·학벌·인맥도 없이 이 자리에 왔고, 하도 힘들어서 (작고하신) 아버지를 일찍 만날까(생각하기도 했다는데)….”

2017년 6월 7일의 늦은 저녁,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장이 숙연해졌다. 관료 시절 직속 상관이었던 김광림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감정에 북받쳐 잠시 말을 끊으면서다.

김 전 부총리의 삶이 뒤바뀐 건 11세 때다. 부친이 서른넷의 창창한 나이에 갑자기 작고하면서 그는 청계천의 무허가 판잣집으로 내몰렸다. 몇 년 뒤 그 집마저 강제로 헐리면서 수도권 외곽에서 천막살이까지 해야 했다.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는 상고 재학 중이던 17세 때 취업해 할머니와 어머니, 세 명의 동생을 부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시 관련 잡지를 보고 인생행로를 바꾼 뒤 피·땀·눈물을 한 말씩 쏟은 끝에 경제수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입지전(立志傳)의 표본이다.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있어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강명훈 변호사를 2년 동안 업고 등교한 고교생 시절의 최재형 감사원장 이야기도 예사롭지 않다. 두 아들을 입양한 것도 범인(凡人)의 경지는 아니다. 그래서 붙여진 ‘미담 제조기’라는 별명은 인생의 자산일 뿐 아니라 훌륭한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직선으로 돌격해 고초를 자초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이야기는 전 국민이 목도한 바다.

시효가 지난 학생운동이나 각종 성공 서사가 밑천의 전부인 기성 여야 ‘잠룡’들로서는 정면 승부가 버겁다. 물론 그 중에도 극적인 인생사를 내세우는 이들이 있지만, 여러 번 써먹은 탓에 신선도는 최하급이다.

역설적인 건 신선도를 잠식한 더께가 맷집을 키워줬다는 점이다. 휴가철 백사장에 발자국 하나 더해본들 티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새벽 눈밭에 새겨진 단 한 개의 발자국은 더할 나위 없이 선연하다. ‘윤석열 X파일’ 논란을 시작으로 ‘이야기 강자’들에 대한 검증의 시간이 본격적으로 도래했다. 이야기가 모든 걸 보장해주진 않는다. 아직 공(gong)은 울리지 않았고, 누가 링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