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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30)제1부 독립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조선공상당이 코민테른의 소위 「12월테제」 지령에 따라 1929년6월 해체되자 그때부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이른바 재건운동이 지하에서 활발히 전개됐다. 지금까지의 인텔리·학생위주가 아니라 노동자·농민 중심의 조선공산당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재건운동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모스크바와 블라더보스토크 등 러시아에서, 혹은 만주와 상해 등지의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추진됐다.
이중 대표적인 재건운동추진세력이 1939년 조직된 박혜영을 중심으로 한 경성콤 그룹이였다.
경성콤그룸은 이관술·이순금(이관술의 누이동생)·김삼용·정태식·이현상과 상해계의 이인동·서중석 및 화요계의 권오직이 당시 출옥한 박헌영을 지도자로 조직한 것이다. 박헌영은 1933년7월 중순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돼 6년 간의 복역을 끝내고 갓 출옥해 있었다.
이 조직은 일제의 온갖 탄압과 회유에도 최후까지 전향하지 않고 사상적 지조를 지킨 동지들만으로 결합된 것으로 유명하다.
경성콤그룹의 조직체계는 △지도자=박헌영 △조직부=김삼용·장규경 △기관지출판부=이관술·김순용 △인민선전부=김이준·정태식·이현상 △노동부=김삼용 등이었다.
와세다대 제일고등학원생인 나의 친구 김덕연은 바로 이 조직의 일본유학생부 책임자였다.
김덕연은 말하자면 박헌영계 공산주의자로 재일본 조선유학생의 조직·포섭책이었던 셈이다.
그는 동경 노가다경찰서에 검거됐다가 1939년3월 기소유예처분으로 풀려난 후 곧바로 서울로 돌아와 김삼용과 접선, 경성콤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그는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조선공산당 재건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러나 이 경성콤그룹도 1940년12월에 김삼용읕 비롯한 일부지도자들이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고 나머지도 1941년6월과 l2월에 거의 모두 붙잡히는 바람에 궤멸되고 말았다(그러나 지도자 박헌영은 이때 피신, 지하에 숨어들어 광주의 벽돌공장 인부로 위장해 지하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세상에 다시 나와 1945년9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경성콤그룹 사건이다.
김덕연도 1940년11월 서울에서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고 말았다.
10개월간의 가혹한 고문 끝에 그는 41년9월 기소됐는데 그때의 기소장을 보면 이관술외 15명으로 되어있다.
참고로 경성콤그룹 사건의 주요멤버를 약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관술(당40세·본적 경남울산군·가명 김종석) △김삼용(당32세·본적 충북충주군·가명 김대원·김성수·김인업) △이현상(당36세·본적 전북금산군) △김태준(당37세·본적 평북운산군·직업 경성제대강사) △김응빈(당38세·전남 제주도구좌면) △김덕연(당27세·본적 경남의령군·직업 조도전대 재학생) △윤한조(당20세·본적 경남진주부·직업 조도전대제}고등학원학생·이 사건 후 이현상의 사위가 되였음) △조복례(여) △조복원(여·당23세·본적 경남하동군옥종면). 그리고 미체포자로 김태연(단치)·박헌영·김순용·조재옥·이순금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은 소화16년(1941년) 9월 경성서대문경찰서 사법경찰관 조선총독부경기도수부 길강정매낭이 경성지방 법원검사국 검사정 산택좌일낭에게 보낸 것인데 맨 끝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피의자 김태연, 동 박헌영, 동 김순용, 동 조재옥, 동 이순금의 소위는 치안유지법 제3조, 동 제5조, 동 제11조 및 출판법 제11조에 각각 해당하는 범죄의 증빙이 충분하지만 도주·소재불명함으로 기소중지를 할 수밖에 없다고 돼있다.
김덕연은 기소되어 형도 언도받지 않은 채 예심상태에서 3년 가까이 옥중생활을 하다 1943년6월 숨겼다.
사망원인은 고문휴유증이었다. 김은 30년대 경남 도평의원을 지낸 부친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란 귀공자 타임의 약골이었다. 이 때문에 일경의 모진 고문을 이겨내지 못했다.
당시 서울에는 「고문왕」으로 소문난 노덕술이란 경찰관이 있었다. 그의 손에 걸리면 어떤 공산주의자도 배겨내지 못했다. 김덕연도 바로 이 노덕술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초주검상태에서 경성여자의전병원으로 옮겨져 숨지고 만 것이다.
경성콤그룹이 서울에서 일망타진되던 무렵인 1940년3월 여운형이 돌연 동경에 나타났다. 내가 여운형이 동경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동경에 온지 약 한 달 후였다. 39년께부터 나는 여운형을 찾아가는 것을 중단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장인 정재화가 여운형의 집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 끌려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의 관심은 「불굴의 투사」 박헌영에게 점점 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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