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朴憲永 浮上
45년10월10일 평양의 「북조선 서북5도당대회」에서 박헌영은 사태를 완전 장악하게 되는데 이영.정백 등은 「분열주의자」로 비판당하고 박헌영의 권위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45년말
-
폭력투쟁자제 합당전력 다짐(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5)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3/“극좌노선은 미군정에 빌미 제공”/박,월북으로 2인자 전락/북,김일성시대 본격 개막 박헌영의 최종월북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주의자 대공산주의자의
-
박헌영 웃고간 평양 울며 떠났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2)
◎신탁통치 소용돌이:3/분국협의회때 “총비서”아닌 “동지”/김일성과 회동후 주도권 빼앗겨 신탁통치문제는 김일성과 박현영의 권력레이스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신탁통치가 김일성
-
전남 노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42)-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제2부
9월8일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것을 알게된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부위원장 허헌과 그의 측근 정백 (장안파 공산당대표의 1인이며 건준조직시의 조직부장) 과 9월4일 허헌이 입원
-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
『근로대중의 영원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 달라!』 『박헌영 동지여 어서 출현하라! 우리는 박동지를 기다린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해방 1주일만인 8
-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30)제1부 독립을 위하여
조선공상당이 코민테른의 소위 「12월테제」 지령에 따라 1929년6월 해체되자 그때부터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이른바 재건운동이 지하에서 활발히 전개됐다. 지금까지의 인텔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