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양성희의 시시각각

여군의 죽음

중앙일보

입력 2021.06.0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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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군 성추행 피해를 신고했지만 조직적 은폐와 가해자 감싸기로 피해 여군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충격을 주고 있다. 군 성폭력 관련 대책과 매뉴얼이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군 성추행 피해를 신고했지만 조직적 은폐와 가해자 감싸기로 피해 여군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충격을 주고 있다. 군 성폭력 관련 대책과 매뉴얼이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얼마 전 여성징병제, 군 가산점 논의가 한창일 때 누군가 “제대 후 보상보다 현역 때 보상에 더 신경 쓰라”는 글을 올렸다. 군대를 다녀올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게 급선무란 얘기다. 국방예산 52조원 시대에 1식 4찬 기본지침도 지켜지지 않은 부실 급식이나 성폭력 피해 여군의 사망 등 잇따라 전해진 군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신세대 장병에게 일과 후 휴대폰 사용을 허가하는 등 ‘달라진 군’은 허울뿐이었다.
특히 성추행 피해를 신고했지만, 구제는커녕 2차 가해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부사관 이모 중사 사건은 참담함을 자아낸다. 혼인신고 당일 세상을 등졌다. 2013년 육군, 2017년 해군에서도 유사한 비극이 있었다. 그때마다 군은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각종 대책을 내놓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에도 공간 분리 등 피해자 보호 매뉴얼이 철저히 무시됐다. 가해자는 두 달 넘게 조사 한번 안 받았고, 피해자는 국선변호사 면담 한 번 하지 못했다. 부대 전체가 조직적 은폐에 나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군이 죽인"(군인권센터) 사건이다. 군 경찰은 성추행 피해는 빼고 '단순 변사'로 국방부에 보고했다.
공군은 2년 전에도 성추행 방조 사건을 덮고 피해자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가해자가 공군 경찰 부사관인, 여군 숙소 침입ㆍ불법촬영 사건도 수사를 미루다가, 군인권센터 폭로가 나오자 구속 조처했다. 이명숙 국방부 양성평등위원장의 말대로 "(군에 성폭력 관련) 제도는 넘치는데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게 문제"다.
여군을 동료 아닌 여성으로 성적 대상화 하는 마초 문화, 군 기강과 인권은 공존할 수 없다는 믿음, 상명하복ㆍ 자기 보전 본능이 강한 폐쇄적 조직문화 등이 군을 성폭력의 온상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군 성폭력 사건을 군 수사기관이 '셀프 수사'하는 모순, 계급장 붙인 군인들이 판ㆍ검사를 맡는 군사법원의 미온적 처벌도 문제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15년~2020년 6월 군 형사사건으로 입건된 성범죄 사건 총 4936건 중 기소된 사건은 44%(2173건)에 그쳤다. 어렵게 기소되더라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는 10.2%였다. 같은 기간 민간인들의 1심 실형 선고 비율(25.2%)보다 15% 포인트 낮았다.
차제에 군사법원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군 기밀 누설·군무이탈 등 군사범죄 아닌 일반 형사범죄는 민간 법원이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019년 보통군사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군사범죄는 8%에 불과했다(형사정책연구원). 독일·네덜란드는 군사법원과 민간법원을 혼합 운영해, 성범죄 같은 일반 형사범죄는 민간법원이 맡는다. 미국·영국에는 군사법원이 있지만, 2심부터는 민간법원이 맡는다. 특히 미 바이든 행정부는 군 성폭력 사건의 수사ㆍ기소를 군 지휘체계에서 분리해 독립적 군 검찰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세계적으로는 프랑스· 일본· 대만처럼 아예 평시 군사법원을 운영하지 않는 나라가 더 많다.
최근 우리 사회는 여성징병제라는 의제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성 평등에 대한 반대급부로 여성 징집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정치인들이 호응하면서다. 젊은 여성들도 전향적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남성 중심적 군사문화가 완고한 가운데,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문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징병제든 모병제든 여자도 얼마든지 군대 갈 수 있지만, 성 평등하고 인권 친화적 병영 문화가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2013년 상관의 성추행과 협박, 가혹 행위 등에 시달리다 약혼자를 두고 생을 마감한 육군 오모 대위는 "저는 명예가 중요한 이 나라의 장교입니다. 정의가 있다면 저를 명예로이 해주십시오"라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누군가 죽어야만 그 고통에 귀 기울이는 사회는 너무도 잔인한 사회다. 당시에도 조직적 축소ㆍ은폐 의혹이 있었고, 유서가 발견된 뒤 수사가 시작됐다. 결국 징역 2년 확정판결이 나왔으나, 1심 군사 법정은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피해자보다 가해자 감싸기 급급
상명하복 조직문화가 만든 비극
미온적 군사법정, 셀프수사도 문제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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