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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닥치고 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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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분배와 성장은 이를테면 적대적 공생관계다.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쪽에 문제가 터진다. 그래도 꼭 하나를 고른다면 필자는 성장 쪽이다. 분배도 나눌 게 있어야 가능하다. 게다가 디플레보다는 인플레가 덜 괴롭기 때문이다.

4년간 ‘닥치고 분배’ 결과물이 #자산 양극화에 벼락 거지 양산 #강력한 성장 담론이 해법 돼야

사양산업에 있어 봐서 잘 안다. 1980년대 말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던 신문산업은 2000년대 초를 정점으로 기울었다. 핵심 인력이 순식간에 과잉 인력이 됐다. 회사도 직원도 서로에게 미안해졌다. 타사, 타 직종과 비교는 언감생심, 밥통 지키는 것에도 감사해야 했다. 존 F 케네디의 “밀물(성장)은 모든 배를 들어 올린다”에 빗대면 썰물은 모든 것을 쓸어갔다.

왜 지금 다시 성장인가. ‘닥치고 분배’의 결과물이 너무 참혹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4년간 지겹도록 부자 증세, 편 가르기 증세를 밀어붙였다. ‘부자 것을 뺏어 빈자에게 나눈다’는 분배적 정의라는 이념을 맹신한 탓이요, 표 득실만 따졌기 때문이다. 결과는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 하늘만큼 벌어진 자산 양극화다.

반면 나라 밖은 어떤가.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2조2500억 달러를 풀어 세계의 산업 지형을 바꾸고 있다. 목표는 지구촌 공급 사슬(supply chain)을 미국화·내국화(On-shoring)하는 것이다. 중국은 수출 외에 내수 경제를 키우는 이중 허리, 이중 순환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EU는 ‘탄소중립경제’를 내세워 ‘유럽챔피언 육성’에 1조 유로를 쏟아붓고 있다. 포장은 각각이지만 세 나라 정책의 핵심은 하나다. 성장. 그것도 남보다 빠른, 남보다 큰 성장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복장이 터질 일인데 더 한심스러운 게 있다. 차기 대권주자군의 인식이다. 우리 대권주자들의 담론은 기껏 기본소득에 갇혀 있다. 나는 20만원, 너는 40만원.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안심 소득, 공정 소득, 말은 비틀었지만 정체는 오로지 분배, 닥치고 분배다. 내년이면 나랏빚이 1000조원을 넘어서는 나라에서, 지난 4년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가장 빨랐던 나라에서 어떻게 빚을 줄일 건지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여야 주자들도 문제가 뭔지는 아는 듯하다. 서로 상대에게 “당신의 ○○소득은 돈이 많이 들어서 못 한다”고 언성을 높이는 걸 보면. 그렇다. 핵심은 돈이다. 기본소득 좋은 줄 누가 모르랴. 돈이 없어 못 한다. 빚을 줄이는 묘수는 따로 없다.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돈을 더 많이 벌거나(성장)다.

성장의 모범 답안은 다 나와 있다. 잠재 대권후보로 불리는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는 “정치·국가 과잉 세태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며 “노동 유연성과 규제 개혁을 통해 대기업이 더 늘어나는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말은 쉽지만 정치적으론 불가능에 가깝다. 노동 유연성을 이루려면 민노총 같은 강성 노조와 맞서야 한다. 어느 정치인이 나서겠는가. 규제 역시 개혁은커녕 기득권 눈치 보기에 바쁘다. ‘타다 금지법’ 같은 신산업 규제가 여야 협의로 일사천리 통과되는 판이다.

나는 10개월 남은 대선의 쟁점이 성장으로 옮겨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실용적 성장이야말로 정치적으로도 힘이 셌다. 박정희의 “잘살아 보세”는 국민을 한마음으로 묶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 오늘날 중국을 어떻게 바꿔놨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클린턴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는 또 어땠나. 제대로 된 성장 담론 하나가 차기 대권 지도를 바꿀 수 있다.

혹여 누군가 어떤 성장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닥치고 성장’이라고 답하겠다. 소득주도 성장, 포용적 성장, 혁신 성장…. 문재인 정부의 성장처럼 수식어가 앞에 붙는 성장은 전부 가짜다. 성장보다는 소득주도니, 포용적이니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무늬만 성장이요, 성장의 탈을 쓴 분배이자 편 가르기다. 이런저런 성장, 다 필요 없다. 그냥 ‘닥치고 성장’이다. 밀물은 모든 배를 들어 올린다. 백사장에 처박혀 홀로 늙어 가던 쪽배 한 척까지도.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