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남정호의 시시각각

정략적 '가짜 종전선언'은 안 된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08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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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유엔총회에서 '연내 종전선언'이 가능하다고 밝혔던 2018년 9월 경기도 파주 접경지역의 북한 초소 모습.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유엔총회에서 '연내 종전선언'이 가능하다고 밝혔던 2018년 9월 경기도 파주 접경지역의 북한 초소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말 문재인-조 바이든 대통령 간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미 관계가 달콤한 밀월로 접어든 모양새다. 문 대통령이 이끌고 간 4대 그룹 대표가 44조원의 투자 패키지를 꺼내자 바이든 행정부는 101만 회분의 얀센 백신 보따리를 보내왔다. 이번 회담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를 강조했다"는 두 정상의 공동성명이었다. 중국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긁은 셈이어서 즉각적인 비난 성명이 나왔다.
 중국을 향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날려온 문 대통령이었기에 이런 언행은 참으로 의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중 간 균형외교에서 돌연 미국 쪽에 선 건 문 대통령만이 아니다. 그의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그랬다. 노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이어 이라크 파병까지 결행하자 진보 진영으로부터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노 대통령이 "국민을 기만한 정권"이란 비난까지 무릅쓴 이유는 무엇이었나.
 당시 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문 대통령은 자서전『운명』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그들(미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사고와 논리는 관성을 갖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같은 논리가 반복됐을 거다. 그렇다면 문 정권이 중국의 분노조차 감수하며 추진하려는 목표는 무엇일까. 그간의 언행으로 미뤄볼 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즉 남북 교류 재가동일 공산이 크다.
 여기에 정권이 목을 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문 대통령이 남북관계에 올인할뿐더러 정략적으로도 매력 만점의 카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 직후 문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 모두 수직 상승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정상회담 뒤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정상회담 뒤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래선지 요즘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북·미 간 물밑 교섭이 한창이란 소문이 돈다. 종전선언이란 물리적 충돌은 끝나고 평화가 정착됐음을 선언하는 정치 행위다. 평화협정과는 달리 몇 번의 회동만으로 합의할 수 있으며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 종전선언이 발표되면 파급력이 엄청날 수 있다. "평화가 뿌리내렸다는 데 주한미군이 왜 필요하냐"는 물음이 나올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 미 워싱턴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이 논의되고 있는 듯하다. 지난달 18일 미 상원에서 열린 폴 라카메라 주한미군 사령관 인준 청문회에서 종전선언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질문에 나선 팀 케인 상원의원은 "그간 한반도에서는 평화협정 논의조차 없어 북한 정권이 '곧 전쟁이 다시 날 수 있다'며 현 상황을 악용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케인 의원은 "한·미가 더는 북한과 전쟁 상태가 아니며 적대적인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하면 주한미군의 임무 수행에 지장을 주느냐"고 라카메라 내정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라카메라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상원의원이 그냥 종전선언 이야기를 꺼낼 리 없다. 워싱턴 내 종전선언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터다.
 평화통일이 진지하게 진행된다면 어느 시점에 종전선언이 이뤄지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중요한 협상 카드로 활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 종전선언을 하는 게 맞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비록 무력 충돌은 없어도 현재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할 수 있나. 세계적 평화론자인 요한 갈퉁은 평화를 두 가지로 나눴다. 살육만 멈췄지 전쟁의 위협은 유지되는 '소극적 평화'와 양측 간의 평화적 교류와 진정한 협력이 이뤄지는 '적극적 평화'다.
 우리는 무늬만 평화인 가짜 종전선언을 원치 않는다.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이 끊임없이 남측을 위협하는데 어떻게 평화 운운할 수 있나. 특히 문 정권이 정략적 술수의 일환으로 종전선언 카드를 사용하려 한다면 이는 잘못된 일이다. 진보든, 보수든 후대의 정권이 적당할 때 요긴하게 써야 할 '통일을 위한 화살'을 낭비하는 건 지탄받아 마땅할 일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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