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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사 죽음 내몬 마초 軍문화···'위계 성범죄' 처벌 법조차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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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내 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군 당국은 특단의 대책이라며 제도 개선을 발표한다. 하지만 현실은 잘 바뀌지 않는다. 보다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군 내 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군 당국은 특단의 대책이라며 제도 개선을 발표한다. 하지만 현실은 잘 바뀌지 않는다. 보다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여군과 여성 군무원을 향한 성폭력에 둔감한 군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 드러났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3일 “절망스러웠을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전했다.

군 안팎에선 남성 중심의 군 문화와 법률ㆍ제도적 미비, 군 당국의 안이한 태도가 화를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군인정신 운운 술 먹인다” 마초 ‘폭음’ 문화 

군 관계자들은 무엇보다 군내 회식 문화가 각종 성폭력 사건의 온상이라 입을 모은다. 실제로 이번 공군 여중사 사건에서도 성추행의 매개체는 회식이었다.

통상 여러 명의 선임 남성이 이끄는 회식의 특성상 집단으로 술을 들이켜 마시는 단체 ‘원샷’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 게 여군들의 전언이다. 그러다 보니 참석자들이 만취한 상태에서 회식이 파한다.

이는 음주 분위기를 악용해 여군이나 여군무원에 대한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군 관계자는 “군인정신 운운하면서 여군에게 작정하고 술을 많이 먹이는 경우도 있다”며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상대가 신고해 사건화되면 술 탓으로 돌리려 한다”고 말했다.

강제추행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모 공군 중사의 영정이 지난 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현실에 놓여 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이날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에게 "딸을 케어하는 그런 마음으로 낱낱이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뉴스1]

강제추행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모 공군 중사의 영정이 지난 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현실에 놓여 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이날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에게 "딸을 케어하는 그런 마음으로 낱낱이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뉴스1]

이처럼 회식 관련 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군은 특단의 대책이라고 내놨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해군에선 성군기 위반 사건이 잇따르자 지난 2014년 7월 회식 장소에 술을 마시지 않고 참관하는 장병을 두는 '회식 지킴이' 제도를 운영했다. 그러나 제도 도입 후 오히려 성범죄 건수가 더 늘어난 것으로 조사되면서 유야무야됐다.

급기야 해군은 2016년 연말을 앞두고 '여군과는 저녁 회식을 갖지 말라'는 극약 처방까지 내렸다. 하지만 "회식 문화가 문제이지 엉뚱하게 역차별을 하느냐"는 반발 속에 지침은 조용히 철회됐다.

현실과 괴리된 군 형법

군 형법에도 허점이 있다. 민간 형법에는 '고용주 또는 상급자가 속임수나 지위, 권력으로 밑의 사람과 성관계를 맺을 경우 처벌'(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하는 조항이 있지만, 군 형법엔 해당 조항이 없다.

국방부 법무관리관을 지낸 법무법인 로고스의 임천영 변호사는 “군은 계급에 따라 상하 위계질서가 엄격하기 때문에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위력ㆍ위계에 의한 성적 관계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며 “미군은 이 때문에 성별과 상관없이 상관이 지휘ㆍ감독 관계에 있는 부하와 성관계를 맺으면 군 형법 위반으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장모 중사가 지난 2일 저녁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 압송되고 있다. [사진 국방부]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장모 중사가 지난 2일 저녁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 압송되고 있다. [사진 국방부]

군 형법 15장은 성폭력을 다루고 있다. 성폭행에 대해선 5년 이상의 징역을, 강제추행에 대해선 1년 이상의 징역을 각각 규정하고 있다. 민간 형법의 동일한 범죄(성폭행 3년 이상, 강제추행 10년 이하)보다 형량이 센 편이다.

이를 놓고 국방부 관계자는 “군 형법은 성범죄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댄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방부를 통해 받은 통계를 보면 2015년부터 2020년 6월까지 군 형사사건으로 입건된 성범죄 사건은 총 4936건이었다. 이 중 기소된 사건은 2173건(44%)이었다.

같은 기간 1심 선고 기준 성범죄 사건 실형 비율이 각각 육군 10.3%, 해군 10.5%, 공군 9.4%였다. 군에선 성범죄로 입건된 뒤 실형 비율은 10건 중 1건꼴이다. 집행유예 비율은 각각 31.9%, 31.6%, 56.5%로 실형보다 3~5배 높다.

남녀고용평등법 적용 안 돼

제도적 사각지대도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등이 발생할 경우 수사와 별개로 사업주가 직권 조사를 하게 돼 있다. 하지만 군은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배제돼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의 모법이 근로기준법인데, 군인과 군무원은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 관계자는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려면 노조가 있고 쟁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군인은 군인사법이나 각 군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민간 회사였다면 당장 대기발령이 나야 할 가해자들이 버젓이 보직을 계속 맡는 경우가 군에선 상당수 있다.

남녀고용평등법 적용을 받는 민간 회사에선 경찰 수사와 별개로 사업주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직권 조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군은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다. [연합뉴스TV]

남녀고용평등법 적용을 받는 민간 회사에선 경찰 수사와 별개로 사업주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직권 조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군은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다. [연합뉴스TV]

양욱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규정이나 지침이 있어도 잘 안 지켜지는 경우가 있다”며 “수사기관이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다면 군 내부 감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짚었다.

구체적인 '성폭력 지침'을 비공개하는 행태도 문제로 지적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국방부가 마련한 성폭력 지침은 군사 비밀은 아니지만, 내부 자료로 분류했기 때문에 민간에 공개할 수 없다”며 “군인이라면 찾아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덮는 데 급급한 지휘관

『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의 저자인 김진형 예비역 해군 소장은 “이번 사건에서 지휘관은 성추행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다”며 “이는 전형적인 군의 병폐 중 하나”라고 말했다.

군에선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면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는 게 상식이다. 군 관계자는 "군 지휘부는 사건ㆍ사고가 이슈화되면 부대 지휘관을 일단 보직해임부터 하는 경향이 있다"며 "지휘관에겐 큰 부담이다 보니 축소하거나 감추려고 드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러다 보니 성폭력 사건은 군 내부에선 일단 쉬쉬하는 분위기다. 성폭력 사건을 다뤘던 현역 군 장교는 “규정대로 피해자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주변에서 ‘문제를 키운다’며 눈치를 줬다”고 말했다. 김 예비역 소장은 “사건ㆍ사고의 발생에 대해 따지는 것보다는 사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심사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

군 대책에도 싸늘한 반응

군은 현재 대책 마련에 고심이다. 국방부는 군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를 만든다고 3일 밝혔다. 이번 사건 수사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조계ㆍ학계ㆍ시민단체 인사 등 10인 이내의 다양한 전문가로 위원회를 꾸린다는 것이다.

또 이날부터 16일까지 2주간 ‘성폭력 피해특별신고기간’을 운영한다. 피해자는 물론 목격자도 국방부 인트라넷 홈페이지의 익명 게시판을 통해 성폭력 사건을 신고할 수 있다.

하지만 군 안팎의 반응은 싸늘하다. 한 여군은 "매번 바꾸겠다고 하지만 언론을 타는 그때뿐"이라며 "지금도 제도가 없어서 성범죄가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일부 군 간부들의 비뚤어진 성 인식이 더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철재·김상진·박용한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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