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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과 논의 않고 받아쓰라고 지시만 하면 ‘독재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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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호 24면

콩글리시 인문학

경북 상주 출신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 문재인정부의 마무리 총리가 됐다. 취임사에서 “현장총리”를 내세웠지만 국정기조를 바꿀 만큼 책임총리, 실세총리 역할을 해낼지 주목된다. 한때 대독총리라는 말이 유행했다. 대통령을 대신해서 치사(致辭)나 읽는 실권 없는 의전용총리라는 뜻이었다. 법에 규정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는 책임총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에선 항상 공염불이었다. 정우택 의원은 이낙연 총리를 두고 대독총리를 넘어 허수아비총리로 전락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토론 안 하는 일방적 회의 문제 #허심탄회하게 의견 교환해야

사실 대통령비서실이 내각 위에 군림하고 있는 정부에서, 내각은 청와대 하명을 받드는 십장(什長·foreman)에 지나지 않는다. TV에는 수시로 수보(首補)회의 광경이 보도되고 있다. 수보회의란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보좌관 합동회의를 가리킨다. 나는 이 뉴스를 볼 때마다 몇 가지 의문이 든다.

비서든 보좌관이든 대통령을 돕는 내부 참모인데 (비서는 입이 없다는데) 이 회의를 공개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고, 여기서 대국민 사과도 하고 주요 국가정책을 내놓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국정을 조율하고 대통령의 정책 결정을 보좌해야 할 참모들이 대놓고 국정을 좌지우지 하면 내각은 비서실 지휘를 받는 하부기구가 되고 만다.

문 대통령은 항상 준비된 원고를 읽기에 바쁘다. 비서진과 토론하든가 상호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이 읽는 원고에는 언제나 일방적인 지시사항만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 원고는 누가 작성했을까? 당연히 비서실 어디선가 만들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읽기 바쁘고 비서들은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다. ‘적자’생존이란 말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적지 않으면 불충(不忠)으로 낙인 찍힐 테니까, 무조건 받아쓰는 게 상책이다. 뭐, 이렇게 번거로울 게 있나? 말씀 자료를 복사해서 하나씩 나눠주면 간단한 일을.

오래전 MBC는 세계적인 석학 헨리 키신저를 초청해서 한승주 고려대 교수(뒤에 외무부 장관)와 대담 프로그램을 마련한 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워싱턴 특파원에게 긴급 지시하여 딕타폰(Dictaphone) 2대를 입수했다. 딕타폰이란 구술된 내용을 발로 조작해 가면서 글로 옮길 수 있게 만든 속기용 작은 기계다. 아울러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는 미국인 2명의 지원을 받았다. 몇 시간 뒤에 나갈 방송을 위해 한쪽은 대화를 영어로 풀어 쓰고, 다른 한쪽에선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기에 바빴다. 키신저는 유대계 미국인으로 일부 발음이 불분명해서 미국인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보회의나 국무회의를 보면 마치 딕타폰을 갖다 놓은 듯싶다. 한 분은 계속 원고를 보면서 지시사항을 읽고 아랫사람들은 받아쓰기에 열중이다. 국정에 대한 허심탄회한 논의나 의견교환은 실종됐다. 누구에게 내 말을 받아 적으라고 큰 목소리로 지시하는 일을 영어로 dictate라고 한다. 여기서 독재자를 뜻하는 dictator (a ruler with total power over a country)가 나왔다. 받아쓰게 하는 자가 바로 독재자(dictator)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일절 토를 달 수 없게 한다면 결코 민주적 지도자가 못 된다. 북한을 보면 늙은 장성이나 고위 각료나 ‘최고존엄’앞에서 받아쓰기에 열중이다. 문 대통령도 북한의 주군(主君)을 닮아 가고 있는가?

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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