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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달항아리 그림은 윤두서 초상화 맥 잇는 작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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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아트 나인원 전시장에서 '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 작품 앞에 선 고영훈 작가. 사진 가나아트]

가나아트 나인원 전시장에서 '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 작품 앞에 선 고영훈 작가. 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별들, 2021,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142.5 x 128.5 cm. [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별들, 2021,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142.5 x 128.5 cm. [사진 가나아트]

달이 두둥실 떴다. 밤하늘에 뜬 달이 아니다.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작업해온 화가 고영훈(69)이 붓으로 빚은 달이다. “먼 옛날 도공이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었듯, 지금 나도 나만의 도자기를 붓으로 빚어낸다”는 그는 긴 시간을 버텨온 달항아리를 정교한 필치로 대형 화면에 담았다.

화가 고영훈, 7년 만의 개인전 #가나아트 나인원, 사운즈 하남 #"시공간과 연결된 나라는 존재"

고영훈의 개인전 ‘관조(觀照·Contemplation)’가 서울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과 사운즈 한남 두 곳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화폭에 돌·꽃·얼굴 등을 그려온 그가 7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엔 그의 후기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를 주제로 한 회화 작품 16점이 출품됐다. 세로 2.6m, 가로 2.7m가 넘는 초대형 작품 '시간을 품은 달'(2020)도 그중의 하나다. 사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이토록 사실적인 화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흙으로 구워진 도자기를 이렇게 엄정한 시선으로 마주하도록 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나인원 갤러리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고영훈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가나아트 나인원 전시장. [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가나아트 나인원 전시장. [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모란· 항아리(Peony · Jar), 2021,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105.5 x 95.5 cm.[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모란· 항아리(Peony · Jar), 2021,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105.5 x 95.5 cm.[사진 가나아트]

도자기 표면에 긁힌 자국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나는 타임캡슐을 다룬다는 생각으로 도자기를 그린다. 내가 그린 것들은 단순히 잘생긴 그릇이 아니라, 사람과 관계를 맺고, 200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온 것들이다. 잘 들여다보면 처음 구워질 때부터 터진 부분도 있고, 담았던 장이 밴 흔적도 있다. 금이 갔는데 끝내 깨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이것들은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다. 이것들을 그리며 나는 달과 지구, 태양계, 그리고 무한한 우주를 생각한다." 
하나의 그릇에서 우주까지 생각이 나아갔다. 
"그릇이든, 인간이든, 우리는 무한한 에너지의 바다에 형상을 갖고 존재하는 개체들이다. 우리 눈에 친근하게 보이는 소재로 우리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아이디어가 시각적인 표현에도 영향을 미치나.
"물론이다. 제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항아리와 그것이 놓은 공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릇의 가장자리와 배경 화면이 겹치고,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 이유다. 각 존재는 하나의 개체이지만, 그것이 놓인 공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즉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과거엔 돌과 꽃과 책 등을 그렸다. 지금 도자에 집중하는 이유는. 
"소재를 통해 세상과 나의 관계를 질문해왔는데, 돌멩이는 그 질문의 시작에 있었다. 돌과 책을 그릴 때는 문명과 자연 등 그 상징이 뚜렷했다. 하지만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이분법적인 생각으로는 다 설명하기 힘들더라. 그래서 과거, 미래와 연결된 나를 생각하며 시공간을 좀 넓혀서 보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 전시작 중 이런 그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으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2021)을 꼽았다. 한 화면에 세 개의 달항아리가 중첩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그는 "물질과 정신을 같이 생각해야 그 존재에 대한 질문이 해결된다"며 "젊을 때는 어떻게 명징하게 그리느냐가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히 보이지 않더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의 가치와 의미를 헤아리게 됐다"고 말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고영훈은 1970년대부터 일찍이 극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려왔다. 대중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소재인 코카콜라 병이나 노동자 계층을 연상시키는 구겨진 군화 그림은 당대의 시대상을 강렬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7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앙데팡당(Indépendant)'전에 선보인 '이것은 돌이다 (This is a Stone 7411)(1974)는 존재론적인 화두를 뚜렷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고영훈, 현·전(現 · 前), Present·Past,2016,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103.5 x 80 cm.[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현·전(現 · 前), Present·Past,2016,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103.5 x 80 cm.[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이이일 (二而一 ), One in Two, 2020,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91 x 185 cm.[사진 가나아트]

고영훈, 이이일 (二而一 ), One in Two, 2020,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91 x 185 cm.[사진 가나아트]

극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많다. 당신의 그림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 
"내 그림은 조선시대 윤두서(1668~1715)가 그린 자화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작품이 보는 이를 압도시키는 이유는 그 안에 정신까지 담았기 때문이다. 껍데기, 즉 겉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상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다. 대상의 본질, 정신을 탐구하며 윤두서 초상의 맥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작업하고 있다."

돌과 책 등을 그리던 그가 도자를 그리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서낭당에서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집에 있던 사기그릇을 그린 게 그 시작이었다. 그는 "척박한 생활 속에서 냄비까지 그렸던 제가 정화수 담긴 사발을 그리면서 드디어 신(神)과 만나기 시작했다(웃음). 도자를 그리며 지금 여기뿐만 아니라 하늘(이상·理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도자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언젠가 그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지금의 작업은 그 끝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다행인 것은 일흔이 된 지금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큰 화폭 위에 해를 그리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극사실주의 구상이 추상에 도달할 수 있다." 
수많은 도자기 문화재를 보고 그려왔다. 어떤 도자기가 좋은 건가.  
"아무리 비싸고, 비례가 완벽해도 세월을 품지 않은 것은 내게 의미가 없다. 내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만히 놓여 있어도 움직임을 담고 있는 것, 정중동(靜中動)의 힘을 담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5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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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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