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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거장 안중식의 '성재수간', 41년 만에 전시장에 나온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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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 안중식, 성재수간, 종이에 수묵담채, 24x36cm. [사진 예화랑]

심전 안중식, 성재수간, 종이에 수묵담채, 24x36cm. [사진 예화랑]

근대 서화의 거장 심전 안중식(1861~1919) 그림 '성재수간(聲在樹間)'이 대중에게 40년 만에 공개돼 전시 중이다. '성재수간'은 안중식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작품의 존재 자체는 알려져 있었지만, 1980년 2월 이래 40여 년간 공식적으로 전시된 적이 없어 직접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안중식 100주기 기념전이 열려 100여 점이 전시에 나왔지만 그 안에 '성재수간'은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당시 그와 함께 활동했던 대표 서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처음으로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서울 가로수길에 자리한 예화랑에서 열리는 '회(洄), 지키고 싶은 것들'이란 전시에서다.

서울 예화랑 '지키고 싶은 것들'전 #한국 최초 미술전 100주년 기념 #서화협회 발기인 9인 작품 공개 #130년 전 미국방문 강진희 그림도

1921년에 열린 한국 최초의 근대미술단체인 서화협회의 첫 전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엔 안중식과 함께 어진화사(御眞畵師·왕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로 활동한 소림 조석진(1853~1920)의 작품을 비롯해 청운 강진희(1851~1919), 위창 오세창(1864~1953), 해강 김규진(1868~1933년), 소호 김응원(1855~1921), 우향 정대유(1852~1927), 관재 이도영(1884~1933) 등 서화협회 발기인 9인의 작품을 비롯해 소정 변관식, 이당 김은호 작품 등 38점이 나왔다. 이 전시를 기획한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1918년 서화협회를 결정한 13인 중의 한 사람인 청운 강진희와 서화협회 발기인들의 제자였던 규당 김재관(1898~1976)의 후손이다.

소림 조석진의 '팔준도'. 1910년대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사진 예화랑]

소림 조석진의 '팔준도'. 1910년대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사진 예화랑]

김 대표는 "강진희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이름을 전해 들었을 뿐 그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면서 "그러나 2년 전 안중식 타계 100주기 전시가 열렸을 때 우연히 그분이 친할머니의 할아버지였고, 집안에 강진희 할아버지를 비롯해 서화협회 발기인들의 작품이 다수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어 "강진희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화협회 최초의 전시가 1921년 열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대 속에서 글씨와 회화를 연구하고 이를 후대에 계승하고자 했던 분들의 열정을 기억하기 위해 전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가을밤 나뭇잎 사이로 바람 소리가···

1910년대 중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재수간'은 세로 24㎝, 가로 36㎝ 크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장의 솜씨는 100여 년의 시월을 뛰어넘어 그 작은 화면 안에서도 압도적인 흡인력을 발휘한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린다'란 뜻의 제목처럼, 화면 안에서 늦은 밤 대나무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릴 듯하다. 집 안에는 선비의 모습이 격자 창호에 비친 그림자로만 묘사돼 있고, 동자가 마당에 서서 소리가 나는 데를 알아보려고 사립문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담았다. 틀에 박히지 않은 구도와 먹의 농담을 풍부하게 살린 필치가 단연 돋보인다.

이 그림은 가야금 연주자인 고(故) 황병기(1936~2018) 명인에게도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KBS 방송국을 찾았다가 녹음실 기사 방에 걸렸던 복사본을 보고 매료된 것. 황씨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현대화도 아닌 전통적인 동양화가 이런 구도인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고 당시의 감동을 회고한 바 있다. 그는 녹음 기사에게 다른 그림을 주기로 약속하고 복사본을 그 자리에서 얻었고, 그날 집에 가져오자마자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 곡이 바로 '밤의 소리'다.

전시엔 안중식이 1910년대 그린 대나무 그림('랑간임풍')과 기러기 떼 그림('노안도') 등 산수화도 함께 나왔다. 조석진의 팔준도(八駿圖)도 눈길을 끈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여덟 마리의 준마를 세필로 역동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밖에 서화협회 3대 회장이었던 정대유의 예서 작품(1910년대)과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세창이 1949년에 쓴 서예작품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1888년 미국 방문한 강진희의 그림

청운 강진희의 매화도. 1910년대 이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예화랑]

청운 강진희의 매화도. 1910년대 이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예화랑]

근대기 서화가이자 관료였던 강진희(1851~1919). 1888년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다. 1888년 쳘영된 이 사진은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예화랑]

근대기 서화가이자 관료였던 강진희(1851~1919). 1888년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다. 1888년 쳘영된 이 사진은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예화랑]

강진희의 매화도와 글씨도 눈길을 끈다. 강진희는 관료이자 서화가로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1841~1905)의 수행원 중 한 명으로 1888년 미국에 갔던 인물이다. 당시 공관원 중 유일한 서화가였던 강진희는 현지에서  '승일반송도'(국립중앙박물관), '화차분별도'(간송미술관) 등을 그려 남겼다. 김소연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1921년 서화협회 전시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전보다 1년이나 앞선 참신한 시도였다"며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도판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작품들이 공개됐다"며 반겼다. 전시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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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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