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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는 뇌사, 태아는 중증장애…보호자가 울면서 한 선택[더오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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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70)

만삭 산모의 심장이 멎었다. 심폐소생술로 겨우 숨은 붙어 있었지만, 회복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심장이 멎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미래가 없었다. 아니 현재조차 없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현상 유지조차 쉽지 않았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산모에게 가장 방해되는 건 다름 아닌 태아였다. 당연했다. 지금 그녀는 두 목숨을 유지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산모가 아이를 품는 것도 제 몸 건강할 때 가능한 법. 바람만 불어도 끊어질 만큼 약해진 산모는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찼다. 10개월간 성장한 아이의 몸집은 산모의 혈관을 압박했고, 모체는 혈액순환조차 여의치 않았다. 시계 분침이 움직일 때마다 혈압은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면 어차피 둘 다 죽는다. 배 속의 태아를 처리해야 했다. 나는 보호자를 불러 동의서를 내밀었다.

“아이는 건강합니까?”

그럴 리가. 산모가 몇 번이나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는데, 배 속의 아이라고 건강할 턱이 있나. 산모의 심장이 멎어 있던 긴 시간 동안, 모체에서 아이로 물과 산소 공급도 끊겼을 터. 필시 아이 또한 죽음과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탄생보다 죽음을 먼저 겪었을 거라니. 맙소사!

산모도, 태아도 생명이 위험하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둘다 죽는다. 뱃속의 태아를 처리해야 한다. 이럴 때 의사는 보호자에게 동의를 구한다. [사진 pxhere]

산모도, 태아도 생명이 위험하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둘다 죽는다. 뱃속의 태아를 처리해야 한다. 이럴 때 의사는 보호자에게 동의를 구한다. [사진 pxhere]

기실 태아는 심장 박동이 남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이미 손상이 심할 터라서, 태아가 죽음을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쉬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마저 쓰러진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 때문에 의사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태아를 살리기도 어렵고, 살리더라도 십중팔구 심각한 중증 장애가 남을 거라고. 보호자는 동의서에 서명을 잠시 멎어 섰다.

“그러면 아이를 꺼내면 산모는 살릴 수 있습니까?“

이번에는 다른 의사가 나섰다. 설명하는 사람은 바뀌었지만, 이야기의 톤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맨정신에 감당하긴 무거운 내용을 줄줄 읊었다. 심장이 멎은 시간이 너무 길다며, 여러 상황을 종합했을 때 산모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는 식물인간이라고 의사가 못을 박았다. 보호자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산모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타깝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머리는 이미 많이 늦었다. 그나마 산모의 몸이라도 살려보려면? 당장 태아를 꺼내야 했다. 그것은 태아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태아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었으니 말이다. 너무 뻔한 얘기지만 살아있는 모든 건 원칙적으로 생명이다. 아이가 살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이미 사그라들고 있는 산모로부터 꺼내주어야 했다. 즉, 산모를 위해서나 아이를 위해서나 태아를 꺼내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만삭 아이는 무조건 살리고 봐야 한다. 그 무엇보다 고귀한 천부인권 앞에 양육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 낙태죄 논의가 일었을 때도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사진 pixabay]

만삭 아이는 무조건 살리고 봐야 한다. 그 무엇보다 고귀한 천부인권 앞에 양육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 낙태죄 논의가 일었을 때도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사진 pixabay]

하지만 당연한 선택을 두고 보호자는 결정을 망설였다. 두 생명을 앞에 두고 판단을 멈칫거린다?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최선의 길이 있는데 시간을 끈다고? 심지어 그 대상이 사랑하는 가족인데? 아마 이 얘기를 듣는다면, 십중팔구 사람들은 보호자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인간말종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남의 일에 너무나 쉽게 도덕을 운운하니까. 물론 나도 마찬가지. 보호자의 망설임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병원이 세상의 전부인, 눈앞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의사였다. 하지만 보호자는 달랐다. 그들에겐 지옥일지언정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울부짖으면서도 앞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는 확고하게 선언했다. 산모는 살아날 희망이 없다고. 아이는 설령 살리더라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장애를 안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대체 어느 누가 어떻게 감당해낼 것인가?

보호자는 결국 태아를 꺼내는 시술을 거부했다. 태아가 죽더라도, 또 산모가 죽더라도. 본인들이 내린 판단이 맞는 것인지 서로 간에 묻고 또 물었다. 의심하고 후회하고 땅에 머리를 처박으며, 이 길이 정녕 옳은 길인지 자책하고 고뇌했다.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며, 자신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겠노라며,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은 명백했지만, 과연 그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맞는지 모호했다. 그래서 나는 법에 물어보기로 했다. 과연 어느 길이 옳은지. 자문에 대한 응답은 금세 돌아왔다. 법적으로는 생각보다 쉬운 문제였던 모양이다.

만삭 아이는 무조건 살리고 봐야 한다고 했다. 그 무엇보다 고귀한 천부인권 앞에 양육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회에 낙태죄 논의가 일었을 때도 비슷한 결론을 들었던 거 같다. 일단 알기 쉬워서 좋았다. 우리는 참으로 속 편한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보호자에게 향했다. 내 모습이 그들에게 부디 악마로 보이지 않기만을 빌면서.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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