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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룽윈·저우언라이 만나자 중공과 내통 의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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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4〉 

국민당이 내전에서 패하자 시놀트는 귀국했다. 하원 청문회에 출석 해 국민당을 두둔했다. [사진 김명호]

국민당이 내전에서 패하자 시놀트는 귀국했다. 하원 청문회에 출석 해 국민당을 두둔했다. [사진 김명호]

충칭(重慶)의 군사참의원 의장 관저는 감시가 철통 같았다. 의장 룽윈(龍雲·용운)은 229일간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10여 년 후, 베이징의 정치협상회의 간담회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매일 신문과 책에 매달렸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애독하며 역대 정치의 득실을 살펴봤다. 정견은 발표할 기회가 있어도 자제했다. 특무들의 감시에 넌더리가 나고 자유가 그리웠다. 하루는 쿤밍(昆明)에 주둔하던 미군 지휘관이 찾아왔다.

룽, 충칭서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홍콩 정착 원했지만 장이 거절 #저우, 룽에게 장과의 결별 권유 #“장 이 타이완에 보낸다” 소문 내 #룽, 감시망 뚫고 홍콩으로 도피

윈난(雲南)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쿤밍 교외의 소옥(小屋)도 상관없다고 하자 훌쩍이며 돌아갔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꼼꼼하고 노련했다. 내 자식들에게 온갖 혜택을 베풀었다. 딸의 미국 유학을 허락하고, 장남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다른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정부는 난징(南京)으로 돌아갈 준비에 분주했다. 나는 홍콩에 정착하고 싶었다. 장제스에게 의향을 전했다.”

장제스는 룽윈의 속내를 훤히 읽고 있었다. 홍콩은 물론, 쿤밍행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군사참의원도 난징으로 이전한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다. 의장이 남의 나라 식민지에 있는 건 말이 안 된다. 전용기 타고 함께 난징으로 가자.” 룽은 거절했다. “창장싼샤(長江三峽)도 여행할 겸 배편으로 가겠다.” 장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룽, 미군 지휘관에게 윈난 귀향 부탁

룽윈의 5남 룽셩쉰은 전인대 부위원장 청스위안(程思遠)의 딸 린다이(林黛)와 결혼했다. 당대의 명배우 린다이가 자살하자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룽윈의 5남 룽셩쉰은 전인대 부위원장 청스위안(程思遠)의 딸 린다이(林黛)와 결혼했다. 당대의 명배우 린다이가 자살하자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1946년 5월 21일, 충칭을 출발한 룽의 행렬은 요란했다. 5남 셩쉰(繩勳)과 7남 셩더(繩德), 수행원과 경호를 겸한 감시원 40여 명 외에 취재기자도 80명이 넘었다. 5일 후, 우한(武漢)에 도착했다. 홍콩 유력 일간지의 보도를 소개한다. “현지의 수장과 군사령관이 전 윈난왕 룽윈을 맞이했다. 기자들이 룽 장군을 에워쌌다. 장군은 윈난의 부로(父老)들과 동북에 가 있는 윈난군에게 안부를 전했다. 고향을 방문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차량으로 시내와 군사령부를 돌아보고 밤늦게 배로 돌아왔다. 국민혁명군 1급 상장의 위풍은 여전했다.”

중일전쟁 시절 윈난에는 4만여 명의 미군이 주둔했다. 지휘관들은 개방적인 룽윈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중일전쟁 시절 윈난에는 4만여 명의 미군이 주둔했다. 지휘관들은 개방적인 룽윈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29일 오전 10시, 난징 부두에 20여 분간 폭죽이 작렬했다. 배에서 내린 룽윈은 국빈 대우를 받았다. 예포 소리에 취한 채 붉은 양탄자 밟으며 마지막 자유를 만끽했다. 관저는 화려하고 경관도 빼어났다. 감시는 충칭 시절보다 삼엄했다. 숙소 주변의 가옥과 상점에 특무요원들이 진을 쳤다. 룽은 행동에 제약을 받지는 않았다. 감시 속에 가고 싶은 곳 가고, 만날 사람도 만났다. 난징의 중공연락사무소 책임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룽윈을 장제스와 떼어놓기로 작정했다. 1947년 여름, 한낮에 룽의 관저를 방문했다. 국·공담판이 파열되고 중공대표단이 옌안(延安)으로 철수하기 직전이었다. 정원 산책 도중 저우가 본론을 꺼냈다. “해방구 옌안에 와라.” 룽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도 설명했다. “나는 아편이 있어야 한다. 그곳에 가면 불편하다.” 저우는룽을 안심시켰다. “곤란할 것 없다.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 룽의 태도는 애매했다. 거절도 안 하고 응하지도 않았다. 룽과저우의 짧은 만남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룽의 통공(通共)을 확신했다.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군사참의원은 회의가 많았다. 룽의 노출을 줄이기 위해 군사참의원이라는 기구도 없애버렸다. 전략위원회를 신설하고 룽을 주임에 임명했다. 저우는 “장제스가 룽윈을 타이완으로 보내려 한다”는 소문 퍼뜨리고 난징을 떠났다.

장, 룽을 난징으로 보내 더 철저 감시

국·공내전 말기, 윈난군은 중공에 투항했다. 제4야전군을 이끌고 쿤밍에 입성하는 천껑(陳賡). [사진 김명호]

국·공내전 말기, 윈난군은 중공에 투항했다. 제4야전군을 이끌고 쿤밍에 입성하는 천껑(陳賡). [사진 김명호]

외출에서 돌아온 여비서가 룽윈에게 외부 소식을 전했다. “연금 중이던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타이완으로 보냈다. 다음은 장군 차례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룽은 난징 탈출을 결심했다. 측근이었던 영문 비서가 구술을 남겼다. “룽 장군의 지시로 시놀트를 만났다. 시놀트는 중일전쟁 기간 지원군 명의로 비호대(飛虎隊, FLYING TIGER)를 조직해 중국 공군을 지휘했다. 일본 패망 후 민간항공사를 설립해 중국에 체류 중이었다. 벽안의 퇴역 장군은 긴말이 필요 없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룽 장군의 청을 수락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 시절 비호대는 쿤밍에 주둔했다. 룽 장군은 시놀트의 청이라면 무조건 들어줬다.”

1948년 12월 8일 새벽, 룽윈은 장제스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남겼다. 평소 안 입던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비서가 새벽 장 볼 때 이용하는 차로 관저를 빠져나왔다. 정보국은 룽이 5남 셩쉰이 있는 상하이에 간 줄 알았다. 셩쉰 미행에만 매달렸다.

셩쉰이 번화가 부지런히 다니며 부친의 감시원들을 농락하는 동안 룽윈은 상하이와 광저우를 경유, 홍콩에 도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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