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국 선포한 마오쩌둥, 룽윈에게 ‘속 빈 강정’ 자리 줘

중앙선데이

입력 2021.05.0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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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5〉

1954년 동북군구가 배포한 50군의 북한철도 복구작업 사진. 합성 흔적이 역력하다. [사진 김명호]

1954년 동북군구가 배포한 50군의 북한철도 복구작업 사진. 합성 흔적이 역력하다.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중순, 중국의 항일전쟁이 승리로 끝났다. 8년간 전쟁을 지휘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중앙집권제의 신봉자였다. 전쟁 기간 중공과의 연합은 어쩔 수 없었지만, 승리가 임박하자 섬멸에 골몰했다. 중공도 매한가지였다. 겉으로는 민주와 평화를 부르짖으며, 뒤로는 내전을 준비했다. 조력자 물색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윈난(雲南)성 주석 룽윈(龍雲·용운)에게 접근했다. 룽윈 연구자의 구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윈난성 주석 룽윈은 국민정부에 편입된 여타 군벌과 달랐다. 중공이 군침을 흘릴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중앙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정과 군사력을 완비한, 윈난의 왕이었다. 중앙정부와의 관계도 변화가 무쌍했다. 파열 직전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피난지로 윈난을 택한 민주인사들을 지지하고, 내전 반대를 주장하는 학생 시위도 모른 체했다. 미군 장군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공산당에 적의를 드러낸 적도 없었다. 타고난 재능과 세련된 기회주의로 18년간 윈난에 군림했다.”

중공, 항일전 승리 후 룽윈 포섭 나서

룽, 중앙인민정부·중앙군사위원
직함은 거창했지만 실권은 없어
직계 윈난군은 6·25전쟁에 참전

룽, 홍콩서 ‘원후이바오’ 복간시켜
호외 내 도피 알리자 장제스 진노
정보 담당 보밀국에 룽 체포 지시

부인 장칭(江靑)과 두 딸을 데리고 룽윈(왼쪽 셋째)등 민주인사들과 회견을 마친 마오쩌둥. 1950년대,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부인 장칭(江靑)과 두 딸을 데리고 룽윈(왼쪽 셋째)등 민주인사들과 회견을 마친 마오쩌둥. 1950년대,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룽윈은 국·공합작 시절 중공 지도부와 왕래가 빈번했다. 장제스는 룽을 의심했다. “매일 밤 공산 비적에게 공산주의 교육받는다”는 일기를 남길 정도였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툭하면 군대의 국가화, 국가의 제도화, 제도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룽을 국·공내전의 장애물로 단정했다. 내전의 출발을 룽윈 제거로 시작했다.

윈난사변으로 권력을 박탈당한 룽윈은 3년 2개월간 충칭(重慶)과 난징(南京)에서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방문객에게 이런 말을 자주했다. “장제스가 나를 타도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장제스와 강산(江山)을 놓고 다툰 적이 없다. 사직(社稷)을 탐하지도 않았다. 정치적 주장이 달랐을 뿐이다. 장제스는 중앙집권을 구상했고 나는 지방균권(地方均權)을 주장했다.”

홍콩에 있는 룽윈의 재촉으로 중공에 투항, 해방군 지휘관 천껑(陳賡)과 악수 하는 루한. 1949년 12월 9일 쿤밍. [사진 김명호]

홍콩에 있는 룽윈의 재촉으로 중공에 투항, 해방군 지휘관 천껑(陳賡)과 악수 하는 루한. 1949년 12월 9일 쿤밍. [사진 김명호]

1948년 12월 8일 호구(虎口)를 탈출한 룽윈은 이튿날 새벽 홍콩에 도착했다. 첸수이완(淺水灣)에 있는 장남 룽셩우(龍繩武·용승무)의 저택을 찾았다. 몇 년 전, 임종을 앞둔 셩우의 부인 후수쩐(胡淑貞·호숙정)이 생애 마지막 구술을 남겼다. “60여 년 전 첸수이완의 집은 우리 두 식구 살기에 너무 컸다. 관리인에게 맡기고 호텔에 머무는 날이 많았다. 12월 초 어느 날 새벽 관리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룽 장군이 오셨다며 더듬거렸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나는 어찌나 놀랐던지 털썩 주저앉았다. 5년 만에 만난 아버님은 여전히 근엄했다. 창밖 바라보며 원후이바오(文匯報)에 연락하라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임원들과 함께 온 원후이바오 사장과 편집인은 정중했다. 세 번 절하고 뒷걸음으로 거실문 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재정난으로 휴간 중인 신문을 아버님 지원으로 복간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12월 11일 원후이바오가 호외를 발행했다. “전 윈난성 주석, 일급상장 룽윈 어제 새벽 홍콩 도착. 목적은 휴양. 친지를 포함한 모든 방문객 사절. 조만간 방문목적 발표 예정.”

장제스는 진노했다. 룽윈 실종 후 선포했던 계엄령을 해제했다. 중앙통신이 성명을 냈다. “룽윈은 신병 치료차 3개월간 홍콩에 머물 예정이다.” 믿는 사람이 없었다. 뒷소문이 난무했다. 기자들이 룽의 거처 주변에 진을 쳤다. 모습을 드러낸 룽은 장제스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장은 보밀국(保密局·정보국의 전신)에 룽의 체포를 지시했다. 보밀국에서 파견한 특무들은 암살의 고수였다. 첸수이완 해변 백사장에 무기를 숨겨놓고 룽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홍콩 경찰은 24시간 룽의 거처를 경계했다.

암살의 고수 특무들, 룽 주변 맴돌아

베이징 시절의 룽윈. [사진 김명호]

베이징 시절의 룽윈. [사진 김명호]

1949년 1월 말, 장제스가 하야를 발표하자 룽윈도 성명을 냈다. “장제스는 국가를 오도했다. 형식만 하야가 아닌 은퇴라야 한다.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건 도리가 아니다. 은퇴하면 다시는 장제스를 비난하지 않겠다.” 윈난성 주석을 계승한 루한(盧漢·노한)에겐 중공과 합류를 독촉했다. 지지부진하자 루를 질책했다. 그해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베이핑(北平)에서 열렸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홍콩에 있는 룽윈을 특별초청자 대표로 추대했다. 신중국 선포 후에도 중앙인민정부 위원과 중앙군사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룽윈은 계속 루한을 재촉했다. 12월 9일 루가 부대를 이끌고 중공에 합류, 윈난 해방의 물꼬를 열자 홍콩을 출발, 베이징으로 향했다.

신중국은 룽윈에게 실권은 주지 않았다. 거창한 직함만 여러 개 안배했다. 장제스가 베트남에서 동북으로 이동시킨 윈난군 60군은 비운의 군대였다. 국·공전쟁 초기 중공에 투항해 4야전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공에 비해 대우는 받지 못했다. 50군으로 군명을 바꿔 동북변방군에 편입됐다. 동북군구는 6·25전쟁에 파견할 항미원조지원군의 선발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50군은 지원군 중 가장 오래 한반도에서 작전을 폈다. 평균 열 명 중 여섯 명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어려운 복구 작업엔 50군을 투입했다. 50군 병사들이 즐겁게 일하는 합성사진이 화보 표지에 자주 등장했다. 귀국 후엔 50군을 없애버렸다.

베이징에 정착한 룽윈은 전공(前功)에 합당한 예우를 받았다. 1957년 반우파운동이 벌어지자 상황이 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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