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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어느 악기 봐야하나' 스코어리더가 알려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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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음향실에서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며 중계 화면을 제작하는 스코어리더 권수정(일어선 이)씨. [사진 예술의전당]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음향실에서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며 중계 화면을 제작하는 스코어리더 권수정(일어선 이)씨. [사진 예술의전당]

20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음향실. 로비와 객석 사이에 있어 무대가 한 눈에 보이는 이 방은 공연이 시작되며 분주해졌다. 무대 위의 공연은 2021 교향악축제 중 19번째인 광주시립교향악단과 피아니스트 손정범의 연주. 예술의전당은 이번 축제의 공연 총 21회를 네이버 TV에서 생중계했다.

'악보 전문가' 스코어리더의 세계 #공연 영상화·중계 늘어나며 주목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시작 전부터 도입부를 연주하는 호른 네 대에 카메라가 고정됐다. 그 다음은 피아노 건반을 잡은 화면이 준비하고 있다. 차이콥스키 악보에 따른 흐름이다.“네 마디 후 금관악기 나옵니다. 화면에 트롬본과 트럼펫까지 잡히도록 카메라 뒤로 빼놔주세요. 하나, 둘, 셋, 넷.”이날 공연 중계의 스코어리더 권수정(31)씨는 오케스트라 모든 악기의 악보가 한 데 나온 총보(總譜, 스코어)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자 이제 플루트 잡아주시고, 전체 화면으로 넘어갈게요.”

이날 공연을 촬영한 카메라는 모두 7대. 스코어리더(score reader)는 오케스트라 악보를 보며 찍어야 할 악기, 단원을 지정해준다. 영상 감독은 여기에 따라 카메라들의 위치를 조정하고 정확한 순간에 특정한 단원이나 악기를 메인 화면으로 옮겨 송출한다. 음악 공연의 영상화가 일반화하면서 오케스트라 영상에서 스코어리더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의 지난 20일 중계 화면. [사진 중계영상 캡처]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의 지난 20일 중계 화면. [사진 중계영상 캡처]

이날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나오는 악기는 다음과 같다. 제 1ㆍ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기와 플루트ㆍ오보에ㆍ클라리넷ㆍ바순ㆍ호른ㆍ트럼펫ㆍ트롬본의 관악기, 그리고 팀파니다. 각 악기가 보는 서로 다른 악보들이 한번에 적힌 총보는 보통 지휘자만 사용한다. 수평으로 흘러가는 각 악기의 악보를 수직적으로 한번에 읽어내는 ‘스코어 리딩’은 복잡한 일이다.

이번 교향악축제의 영상 중계 21회를 담당한 권수정씨는 지휘 전공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휘과를 지난해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2017년에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는데 코로나19로 오케스트라 영상 공연이 늘어나면서 여러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하고 있다.”그는 “해외 오케스트라의 공연 DVD, 유튜브 등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며 “그때그때 정확한 악기를 찾아가야하기 때문에 몇십마디 전부터 계획하고 있어야 하고, 특히 말러, 슈트라우스, 쇼스타코비치처럼 19세기 이후 오케스트라 규모를 늘린 작곡가들의 작품이 까다롭다”고 했다.

복잡한 곡일수록 스코어리더의 할 일이 많아진다. 20일 2부에 연주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차이콥스키 협주곡의 오케스트라 편성에 악기가 더 추가된다. 튜바, 스네어 드럼, 트라이앵글, 탐탐, 피아노, 첼레스타, 실로폰까지 나온다. 교향악축제에서 13일 대전시향이 연주한 말러 교향곡 6번에는 팀파니 6대에 거대한 망치, 소방울 종 등의 기상천외한 타악기가 복잡하게 등장한다. 권씨는 “악기가 많고, 갑자기 연주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화면이 엉뚱한 악기를 잡고 있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의 지난 20일 중계 화면. [사진 중계영상 캡처]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의 지난 20일 중계 화면. [사진 중계영상 캡처]

스코어리더는 새로운 직업이 아니고, 오케스트라 공연 중계와 함께 생겼다. 공연 중계 프로그램인 ‘KBS 중계석’의 스코어리더인 류혜린(38)씨는 “스코어리더는 1980년대 후반부터 있었고 지금 활동하는 사람들은 2세대 정도인데 스코어리딩이 본격적 직업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 소개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스코어리더가 4명이 있다.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전공하고 2006년 스코어리더 일을 시작한 류씨는 “청각으로 경험하는 교향곡을 시각으로 바꿔내는 공감각적인 일”이라고 스코어리딩을 설명했다. “멜로디만 단순히 따라가서도 안되고, 작품을 구조적으로 파악해 중요한 맥락을 짚어주며 음악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영상화에 앞장선 외국의 오케스트라는 스코어리더를 적극 활용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공연 영상을 유료 제공하는‘디지털 콘서트홀’을 2008년 시작했다. 프로젝트 소개 영상엔 “악보가 카메라샷의 베이스가 된다. 한 마디, 한 마디, 음표 하나하나가 이미지가 된다”는 설명이 나온다. 류혜린씨는 “영상화를 오래한 유럽의 교향악단은 카메라마다 스코어리더가 배치된다 들었다”고 전했다.

KBS 중계석의 스코어리더인 류혜린씨. [사진 류혜린씨 제공]

KBS 중계석의 스코어리더인 류혜린씨. [사진 류혜린씨 제공]

스코어리더는 오케스트라 공연의 현장 감상 이상의 경험을 추구한다. 류씨는 “특히 교향곡 공연을 처음 보는 관객은 연주 중 어디에 주목해야할지 알지 못한다”며 “지금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내야 하고 그러려면 악보 뿐 아니라 작곡가, 작곡 배경, 지휘자의 해석까지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네이버TV의 공연 중계는 600여건. 2019년 77건에 비해 7배 이상 늘었다. 예술의전당 문성욱 영상화사업부장은 “예전에는 스코어리더가 음악대학 재학생의 아르바이트 정도였다면, 공연 중계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음악과 영상을 두루 알고 경력도 오래된 스코어리더가 더 많이 필요해지리라 본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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