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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법원의 위안부 해법, 한·일 외교로 풀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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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법원이 21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하며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통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 모색을 주문했다. 한·일 과거사 문제가 문재인 정부 지난 4년 동안 ‘사법’의 영역에 있다가 다시 ‘외교’의 영역으로 방향타를 튼 것이다.

법원 “국제법상 국가면제 원칙 인정” #일본 정부 상대 2차 손배소 각하 #1월 배상 인정 판결과 다른 결정 #이용수 할머니 “국제사법재판 갈 것”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부장 민성철)는 이날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가족 20명이 낸 소송을 각하하며 일본 정부에 대해 ‘주권면제(국가 면제)’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에게 청구권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며, 한·일 간 합의에 의해 손해배상 청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보지 않는다”면서도 “현실적으로 주권면제에 대한 관습법과 대법원 판례의 범위에 따르면 외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해 본안 심리 없이 소송을 끝내는 결정이다.

앞서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부장 김정곤)는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반인도 범죄인 위안부 피해는 국제법규상 상위에 있는 ‘절대 규범(국제 강행 규범)’을 위반한 것이라 주권면제가 적용될 수 없다는 취지로 판결했는데 정반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주권면제는 한 나라의 법원이 다른 나라 정부의 주권 행위에 대해 재판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는 규범이다. 국제법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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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특히  위안부 문제 해결의 주체는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라는 점을 스스로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대한민국이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피고(일본 정부)와의 외교적 교섭을 포함해 대내외적 노력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사법부 판단, 국제법 존중 쪽으로 돌아와…정부, 대일 협력 운신의 폭 넓어져”

또 “기존의 면제론에서 새로운 예외를 인정할지 여부나 범위는 대한민국 국익에 미칠 유불리를 냉정하게 고려해 세밀하게 정해야 하며,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책 결정이 선행돼야 한다”고도 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외교 영역에서 다뤄지던 위안부 문제가 국내 소송으로 사법 영역에 들어왔는데 재판부는 한·일 양국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며 다시 외교의 영역으로 밀어냈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이날 판결로 일본의 배상 책임과 그에 따른 일본 자산 압류·매각 등의 절차가 한·일 간 갈등 사안으로 급격히 번지는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이번 판결을 통해 국제법의 일반적 흐름을 존중하는 쪽으로 사법부 판단이 다시 돌아왔다”며 “정부도 대일 협력을 꾀하기 위한 운신의 폭이 보다 넓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 일본상대 1·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주요 일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위안부 피해자 일본상대 1·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주요 일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번 판결은 1심 판결이긴 하지만 임기 말 일본과의 관계 개선으로 방향을 튼 정부 행보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판결 직후엔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고, 일본 정부는 강력 반발했다.

이와 관련, 현 정부가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다면서 사실상 파기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다시 주목되고 있다. 재판부도 이날 “위안부 합의는 (2015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 사이의 개인적 합의가 아니고 국가 간 합의”라며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의 대체적 권리 구제 수단이 마련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 측은 10억 엔(약 103억원)을 지급했고 이를 재원으로 생존 피해자 35명,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 64명이 현금을 수령한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사법부와의 ‘재판 거래’ 검찰 수사로 곤욕을 치렀던 외교부는 “상세한 내용을 파악 중이며 구체적인 언급은 자제하고자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 한·일 위안부 합의를 꺼내들었다.

외교부는 “위안부 합의 등에서 (일본이) 스스로 표명했던 책임 통감과 사죄, 반성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일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판단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는 정부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오늘 판결로 (사법부 판단 존중을 강조해 온)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내 일본과의 대화에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이날 판결에 대해 이용수 할머니는 “너무 힘이 든다.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이 사안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꼭 회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지혜·정진우·이수정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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