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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죠·오조오억·보이루…남혐·여혐 날 선 ‘언어 전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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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호 02면

젠더 갈등 심화

2018년 6월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일대에서 벌어진 시위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프라인 집회로 평가된다. 참가 여성들은 ‘홍익대 미대 몰래카메라 사건’에서 피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경찰이 불평등한 편파 수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2018년 6월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일대에서 벌어진 시위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오프라인 집회로 평가된다. 참가 여성들은 ‘홍익대 미대 몰래카메라 사건’에서 피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경찰이 불평등한 편파 수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방송인 공서영이 온라인상에서 ‘남성 혐오’ 단어를 사용했다는 논란이 일자 공개 사과했다. 공씨는 지난 14일 오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한 아이스크림 브랜드 제품 사진과 함께 “우리 동네 베라 힘죠! 트리플민초. 파이팅”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후 ‘힘죠’라는 표현이 성소수자 리벤지 포르노에서 시작된 것으로 일부 여성 커뮤니티에서 ‘남혐(남성 혐오)’을 조장하기 위해 쓰인다는 지적이 나왔다. ‘힘내’도 아니고 ‘힘죠’라고 쓴 것은 분명한 메갈 용어라는 비판이다. 공씨는 “저는  ‘힘내다’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알고 사용한 것”이라며 “이 표현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데 쓰이고, 많은 분이 불편을 느끼셨다면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일베서 시작, 메갈리아로 번져 #‘맘충’ 비난에 ‘허수애비’ 맞대응 #한남유충 등 도 넘는 표현도 #말 자체 아닌 젠더 갈등이 뿌리 #정치·경제 불안, 불평등 구조 탓 #특정 집단 대상 배타성 드러내

혜화역 시위, 오프라인에서도 표출

대표적 성차별 사이트인 메갈과 일베에서 쓰이는 단어를 놓고 사이버 공간에서 끊임없는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성차별 의도가 담긴 ‘힘죠’와는 달리 이게 왜 문제인가 싶은 단어도 논란의 표적이 된다. 지난 9일 유튜버 ‘중년게이머김실장’은 한 온라인게임을 설명하는 영상에서 ‘오조오천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017년 방영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여성 직장인으로 보이는 시청자가 “우리 XX이 오늘도 십점 만점에 오조오천억이야”라는 댓글을 단 것이 유행을 탔다. 한 참치 회사에서 광고에 ‘오조 오억개의 레시피’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남성 유저들을 중심으로 “여초 커뮤니티에서 남성 정자 수가 많다고 희롱하는데 쓰는 표현”이라며 “반감을 느끼는 단어는 피해야 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김실장은 “걸러냈어야 한다고요? 모르는데 어떻게 걸러내나요?”라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지난 12일 해당 부분을 삭제한 영상을 새로 올렸다.

이같은 ‘언어 전쟁’에 대해 2030 남성들은 몇몇 급진적인 페미니즘 사이트에서 벌인 일에 대한 ‘미러링’이라고 주장한다. 영화관에서 배우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쓴 ‘웅앵웅’이라는 표현을 ‘군대 얘기만 반복하는 남자’라는 의미로 쓰거나, 무언가를 급하게 먹는 모습을 표현하는 인터넷 신조어 ‘허버허버’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남성이라는 뜻으로 쓴다는 것이다. 허버허버 논란이 일자 지난달 카카오는 이 단어가 들어간 이모티콘 판매를 중단했다.

2030 남성들은 ‘메갈 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구독자가 400만 명에 달하는 게임 유튜버 ‘보겸’은 ‘보이루(보겸+하이를 합친 말)’라는 인사 때문에 홍역을 치렀다. 여초 사이트에서 ‘여혐(여성 혐오)’ 표현이라고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가톨릭대 철학과 강사인 윤지선씨는 지난해 학술지에 실린 ‘한국남성성의불완전변태과정’이라는 논문에서 ‘보X+하이의 합성어로 초등학교 남아들이 일상 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여혐 용어’라고 주장했다. 보겸은 가톨릭대, 철학연구회, 한국연구재단 등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법적 대응에 나설 예정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논문을 비롯해 워마드, 여시(여성시대) 등에는 ‘한남’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한국 남자’의 준말이라고 해명하지만 실제로는 한국 남성을 벌레로 비하하는 ‘한남충’을 의미한다. 어린이들은 ‘한남 유충’이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진흥교육원(양평원)에서 내놓은 영상이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2월 제작한 이 영상에는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가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나윤경 원장은 “성인지 교육으로 남성 스스로가 자신은 성폭력을 가하는 남성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시민적 의무”라고 말했다.

젊은 네티즌들이 날선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사이트에서 시작됐다. 2010년 ‘디시인사이드’에서 갈라져 나온 일베는 아동성애, 패륜, 노무현 전 대통령과 5·18민주화운동 비하 등으로 여러 차례 물의를 빚었다. 이에 맞서 디시인사이드를 이용하던 여성들은 2015년 메갈리아 사이트를 만들었다. 메르스와 페미니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이름을 따왔다. 일베를 미러링해 뭐가 잘못인지 보여주겠다는 취지와는 달리 남혐 언어폭력, 아동폭행, 남성 도촬 유출 등의 문제를 일으켜 2017년 운영을 중단했다. 이후 극렬 여성주의 성향 이용자들은 워마드와 여시 등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일베와 메갈은 일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일베에서 범죄 현장에서 어쩔줄 모르는 여경을 비하하는 ‘오또케’라는 여혐 단어를 만들어내자 메갈은 무개념 중장년 남성을 의미하는 ‘개저씨’로 응수했다. 극성 맘카페 회원을 ‘맘충’이라고 비난하자 메갈에서는 ‘애비충, 허수애비’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전문가들, 정부 차원 개입 의견 갈려

이같은 갈등이 오프라인으로 가장 크게 표출된 것이 2018년 혜화역 시위다. 홍익대 미대 크로키 수업에서 남성 누드모델의 얼굴과 성기를 몰래 촬영해 워마드에 올린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워마드 회원이던 여성 동료 모델을 범인으로 체포하자 “여성이 몰카 피해자일 때는 수사를 하지 않다가, 피해자가 남성이라니 재빠르게 움직인다”며 6차례에 걸쳐 편파수사 규탄 시위를 벌였다.

문제는 이같은 갈등을 잠재울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국립국어원의 이대성 학예연구관은 “오조오억, 보이루, 허버허버 현상의 경우 말 자체에는 죄가 없는데 꼬투리를 잡아서 사람(메신저)을 괴롭히는 사회문화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젠더 갈등이 심해지다 보니 애꿎은 단어까지 곁다리로 끌려와 비아냥이나 혐오의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는 가치중립적인 ‘홍어’가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 된 것처럼 성차별적 뜻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단순히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인 불안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점도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정부나 사회가 지나치게 한쪽 편을 들어주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논란이 시작되는 만큼  정부나 사회에서 젠더 차별 관련 신조어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부추긴 면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희정 국민대 교수는 “성차별 또는 혐오의 언어는 사회구조적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배타의 정서를 표출하는 것”이라며 “경제적으로 각박해지고 불평등 구조가 심화하면서 공격하기 쉬운 집단을 대상으로 개개인의 불안과 불만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개입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임 교수는 “전체가 잘못된 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2%의 사람들이 논란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것”이라며 “단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일상적인 영역까지 퍼지지 않도록 정부 차원에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이 연구관은 “국가 기관이나 공공성을 가진 곳에서 이것은 성차별 어휘다, 아니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대중들에게 고민거리를 만들어주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율적으로 합의해 나가도록 유도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깜깜이·절름발이·장님 등 일상 속 차별 언어 많아

혐오표현

혐오표현

지난해 8월31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앞으로 브리핑에서 ‘깜깜이 감염’ 대신 ‘감염경로 불명’으로 표현하겠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차별적 용어라며 개선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도 지난해 국회 질의 과정에서 ‘절름발이 정책’이라는 말을 썼다가 사과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차별적 언어는 생각보다 많다.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는 2019년 내놓은 ‘장애 관련 올바른 용어 가이드라인’에서 ‘꿀 먹은 벙어리’, ‘장님 코끼리 만지기’ 등도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말문이 막힌’, ‘주먹구구식’으로 쓰자는 것이다. ‘벙어리장갑’도 ‘손모아장갑’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구미에서는 이같은 문제를 한차례 겪었다. 흑인 대신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튜어디스 대신 항공승무원(플라이트 어텐던트)을 쓰는 이유다. 리눅스·트위터 등 정보기술(IT) 업체들은 올해 초 인종차별 논란이 벌어질 수 있는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대신 디나이리스트·얼로우리스트를 쓰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관용어고, 어디부터 차별인지 기준을 정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서도 ‘레임덕(절름발이 오리)’이라는 말은 여전히 쓴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과거 서울맹학교 교명을 시각장애인학교로 바꾸려다가 오히려 동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학생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며 “단어 하나하나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와 제도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창우 기자, 오유진 인턴기자 changwoo.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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