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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없는 사람 그림…헉, 우리 애가 '블록인간'?

중앙일보

입력

미술치료사 팽은경씨는 얼마 전 한 아이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 자신을 그렸다는데 두 팔이 없는 기이한 모습이었던 것. 손 없는 사람을 그리는 아이는 더러 봤지만 아예 팔이 없는 그림은 흔치 않은 사례다. 더러 학대를 받거나 팔에 상처를 입은 경험 때문에 팔을 안 그리는 아이는 있었지만 이 아이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다. 왜 팔 없는 사람을 그렸을까. 종합적으로 상담해보니 부모가 공주처럼 떠받들며 키운, 소위 과잉보호의 결과였다. 팽씨는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 나이인데도 밥 먹여주고, 준비물 챙겨주고, 옷도 입혀주는 등 부모가 모든 걸 다 알아서 해주니 스스로 해야 할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아이들의 무력감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선 아직 보고된 사례가 극히 드물지만, 이웃 일본에서는 이미 팔 없는 사람을 그리는 아이들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최근 번역 출간된 '팔 없는 사람을 그리는 아이들'(후지와라 도모미 지음.기파랑 잎새)은 그 실상을 잘 보여준다.

마치 블록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블록인간'이라고 불리는 이 아이들은 단순히 그런 흉칙한 그림을 그려서가 아니라, 어휘력이나 숫자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자발성이 결여된 무기력이 학력저하를 불러온다는 주장이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붙어사는 엄마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아이들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개인의 학력저하로만 그치지 않는다. 밖으로 향하는 어휘가 빈곤하다는 건 사고나 감정도 풍부하지 못하다는 증거. 결국 자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다 보니 사회성이 떨어지고 폭력성이 늘어 사회 전반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후지와라는 블록인간의 원인을 지나친 과잉보호와 과잉보호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조기교육으로 진단한다. 과잉보호와 조기교육이라면 전 세계 어느 엄마에게 뒤지지 않는 한국 엄마들을 생각하면 이웃나라에서 출현한 블록인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에서 '집단 따돌림 백서'가 나왔던 1984년만해도 일본의 집단학대(집단 따돌림)는 정말 딴 나라 얘기였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후에 '왕따'란 이름으로 그 고민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이 블록인간은 곧 우리 사회의 걱정거리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서울미술치료연구소 전순영 소장은 "과거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거칠고 단조로운 언어를 공격적으로 사용하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로 양분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동청소년상담센터를 운영하는 신철희 소장은 "우리 아이들의 정서가 아직은 일본보다 덜 망가졌지만 우리 사회도 건강하지 않다"면서 "다른 모든 걸 포기하면서 성적과 학습과 관계된 아주 작은 부분으로 치닫는 한국식 조기교육은 아이들을 블록형 인간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부모가 떠먹여 주는 조기교육은 아이의 능력을 키워주기보다 오히려 학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 소장은 "아이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어 뭐든지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거나 거꾸로 아이가 뭔가 혼자 하는 게 못 미더워 자기 손으로 다 해주려는 과잉보호는 부모.자식 관계 자체를 망가뜨린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아이의 손을 놓고 나이에 맞는 행동 반경을 넓혀줘야 블록인간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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