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관련 근거중심의학의 세계적 동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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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과학과 문명이 인체와 인간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유일한 설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의학은 하나로 통일될 수 없으며, 인체와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관점만큼이나 다양한 체계의 의학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최근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약 80% 정도의 의료소비자가 전통의학 혹은 보완대체의학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지역에서 발달된 한의학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전통의학으로서 양의학과 의료의 한 축을 이루어 가고 있다.
의료는 효과적이어야 하고, 부작용이 적어야 하며, 간편해서 사용이 쉬워야 하고, 비용이 저렴해야 하는데, 한의학이 양의학과 더불어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2002년, 근거중심의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Sackett은 근거중심의학은 환자치료를 위한 의사결정 과정에 의사의 임상적인 전문성, 환자의 가치와 최선의 근거를 종합적으로 반영시키는 것이며, 그 임상적인 전문성은 의사의 축적된 경험, 교육과 치료기술에 의해 좌우되고, 환자는 그 자신의 관심, 기대 및 가치를 제시하며, 최선의 근거는 대부분 적절한 방법으로 진행된 임상 연구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근거 그 자체가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환자 치료의 과정을 도와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근거중심의 결정은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와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입장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부분의 의료인들이 추구해왔던 정신이자 자세였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핵심은 의사결정을 위한 가장 훌륭한 학술적 근거를 의사들이 좀 더 체계적이고도 기술적으로 획득하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최근 WHO 서태평양지역 전통의학 프로그램에서는 한의학이 전 세계 인류를 위한 의학으로 발돋움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표준화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용어, 의료정보, 鍼灸 穴位 및 27개 특정 질환에 대한 임상진료 가이드라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표준화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전세계 한의학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한의학의 표준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핵심 방안으로서 근거중심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 2000년 1월 11일 WHO에서도 모든 WHO의 가이드라인은 근거중심이어야 함을 권고한 바 있다.
최근의 Cochrane database에 등재된 3925개의 systematic review 가운데 침구를 포함한 한의학분야의 임상연구 보고는 35개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의학계가 본격적인 임상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한방 임상 자체가 체계적인 임상연구를 시행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일본에서는 800여 한방 임상연구를 분석한 ‘EBM 한방’이라는 책자를 발간한 바 있으며, 중국에서도 최근 북경중의약대학에 ‘Evidence-Based Chinese Medicine Center for Clinical Research and Evaluation (임상연구와 평가를 위한 근거중심의 중국의학 센타)’을 설립하여 근거중심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근거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평가 기준이 지나치게 서구편향적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근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한의학 고유의 특징과 장점을 훼손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국내외 한의계 일각에서 근거중심의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대해 회의와 우려를 가지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고 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WHO에서는 지난 7월 6-8일 대구에서 각국의 관련 학자들을 초청하여 한의학의 전통은 살리면서도 객관적으로 수용 가능한 근거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를 주제로 전문가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한의학은 전염병에 대한 대책과 외과적 수술 등에 장점을 가진 양의학으로부터 도전을 받아 뒷전으로 밀려났다가, 최근 겨우 다시 그 역할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제는 오랜 경험 중심에서부터 근거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더욱 본질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한의학의 세계화는 이 시대 한의계의 사명이다. 한의학이 세계화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국내에서 우수한 의료로서 인정과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준화되어야 하고, 또 경험으로부터 나아가 근거를 제시하여야만 한다. 이제 근거중심의학은 모든 의학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앞으로 인류를 위해 바람직한 의학은 근거중심의학 이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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