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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승부사 '영원한 국수' 김인 9단 타계

중앙일보

입력

4일 별세한 김인 9단. [사진 한국기원]

4일 별세한 김인 9단. [사진 한국기원]

한국 바둑계의 거목, ‘영원한 국수(國手)’ 김인 9단이 4일 별세했다. 78세.

194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국 현대바둑에서 첫번째 세대교체를 이뤄낸 인물이다. 한글을 깨칠 무렵 접한 바둑이 평생의 길이 됐다. 1955년 바둑판을 안고 홀로 상경, 김봉선 5단과 아마 고수 이학진을 사사했다.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운지 3년 6개월 만인 58년 15세 나이에 입단하면서 ‘중후한 기풍과 심연의 수읽기’란 평가를 받았다. 1962년 당시 세계 바둑의 메카로 통하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기타니 미노루 9단을 사사했다. 일본 언론은 김인과 일본의 오다케(大竹英雄), 대만의 린하이펑(林海峰) 등 동아시아 3국 천재들을 한데 묶어 ‘김죽림(金竹林) 시대’를 예언하기도 했다.

1963년 귀국한 고인은 66년 10기 국수전에서 조남철 8단을 꺾고 우승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20년간 한국 바둑을 군림해온 조남철의 아성을 허물고 김인 시대의 출발을 알린 것이다. 1971년 15기 국수전까지 6연패를 달성해 바둑계에서 ‘영원한 국수’ ‘김국수’ 등으로 불렸다.

1971년 1월 서울 운니동 운당여관에서 열린 15기 국수전. 김인(왼쪽) 과 조남철의 대국 장면이다. [사진 한국기원]

1971년 1월 서울 운니동 운당여관에서 열린 15기 국수전. 김인(왼쪽) 과 조남철의 대국 장면이다. [사진 한국기원]

이후 조훈현 9단에게 한국 바둑 일인자 자리를 넘길 때까지 고인은 왕위전과 패왕전을 각각 7연패하는 등 10여년 간 총 30회 우승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프로생활 63년간 통산전적은 1568전 860승 5무 703패. 1968년의 40연승은 현재까지 한국기원 최다 연승 1위 기록이다.

1960∼70년대 한국 바둑의 도약시기를 평정한 고인이지만 악착스럽고 비정한 승부사는 아니었다. 바둑의 도(道)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였다. “기계처럼 단련하고 세상사를 잊어버린 채 전력을 기울여 승리만을 추구해 이겨지는게 바둑이라면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바둑의 기술자와 바둑의 고수는 다른 것”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고인은 조명 밑에서 시간에 쫓겨 해야하는 TV바둑이 바둑의 본질에 어긋난다며 KBS바둑왕전에는 끝까지 참가하지 않았다.

김인 9단(왼쪽)과 조훈현 9단. 각별한 선후배 사이로 지냈던 두 사람이 설악산 마등령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한국기원]

김인 9단(왼쪽)과 조훈현 9단. 각별한 선후배 사이로 지냈던 두 사람이 설악산 마등령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한국기원]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호인이기도 했다. 상금과 대국료를 풀어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을 챙기는데 앞장섰다. 후배들은 그를 변치않는 ‘청산(靑山)’이라 부르며 따랐다. 평생 즐겼던 술이 건강을 해쳐 2006년엔 위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는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시하는 ‘장이’였고,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될 만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고 고인을 기렸다.

고인은 2007년부터 고향 강진에서 열리는 ‘김인 국수배’에 대회장으로 참여해 아마추어 기사들과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다. 전국어린이 바둑대회로 출범한 김인 국수배는 2008년 국제 시니어 바둑대회로 업그레이드 됐다. 2019년 제13회 김인 국수배를 마지막으로 참관했던 고인은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대회가 열리지 못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임옥규씨와 아들 김산씨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6일, 장지는 경기도 광주 시안추모공원이다. 02-2227-7500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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