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터뷰] “좋은 옷 고르는 비결? 안감 보면 알아요” 40년 내공 패턴 명장의 조언

중앙일보

입력

서울 지하철 동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면 언덕배기를 따라 오밀조밀 작은 봉제 공장들이 모여 있다. 지금은 다소 쇠락한 모습이지만 과거 동대문을 패션 메카로 만들었던 영광의 거리다. 여전히 원단과 의상을 바쁘게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소리를 뒤로한 채 골목 끝자락에 이르면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국내 의류 봉제산업의 역사와 가치를 조명하는 이곳 3층 전시실엔, 흰 무명천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들이 마네킹에 입혀져 있다. 색도 디자인도 없지만, 드레스의 고운 실루엣만큼은 단번에 눈길을 끈다. 국내 최초 양장 부문 패턴 명장으로 선정된 서완석(67) 패턴사의 작품이다.

서완석 패턴 명장이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서완석 패턴 명장이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모델리스트, 옷의 설계자  

지난해 10월 시작해 내달 30일까지 진행되는 기획 전시 ‘국내 입체패턴의 선구자, 대한민국 명장 서완석’은 그동안 패션 업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패턴사(재단사, 모델리스트)의 역할을 조명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패턴사는 디자이너가 구성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인체에 잘 맞는 옷을 만들기 위해 사이즈와 체형을 반영해 마름질하는, 흔히 말해 ‘패턴을 뜨는’ 사람이다. 디자이너가 만든 의상을 실제로 구현하는 설계사 역할이다.

서완석 입체 패턴 명장

서 명장은 그중에서도 ‘입체 패턴’ 전문가다. 평면의 종이에 옷본을 그려서 만드는 ‘평면 패턴’과 달리, 마네킹에 천을 대고 핀을 꼽아가며 패턴을 만들어 신체의 곡선과 옷감의 특성을 살린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명동에 있던 국제복장학원에 다녔던 서 명장은 1974년에 패턴사로 일을 시작했다. 1973년에 의류 회사 ‘신원’이 생기고 1974년에 ‘반도패션(현 LF)’이 생겼으니 우리나라 기성복의 태생부터 함께 한 셈이다. 서 명장은 “당시엔 기성복보다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던 시절”이라며 “명동의 의상실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엔 디자이너 개념이 널리 퍼져있지 않아서 잡지를 보고 패턴사가 옷을 다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입체 패턴은 평면이 아니라 마네킹 표면에 옷감을 부착하면서 디자인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신체의 곡선과 소재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은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에 전시된 서완석 명장의 작품. 사진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

입체 패턴은 평면이 아니라 마네킹 표면에 옷감을 부착하면서 디자인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신체의 곡선과 소재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은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에 전시된 서완석 명장의 작품. 사진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

이후 약 10여년간 패턴사로서 안정적으로 일해 왔던 서완석 명장은 한 세미나에서 ‘입체 패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곧 입체 패턴의 시대가 올 것으로 확신해 1982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의 ‘반탄디자인연구소’에서 입체 패턴을 공부한 후 1984년 서울에 돌아와 명동에 ‘입체패턴연구소’를 새웠다. LF·제일모직 등 국내 의류 업체의 기술 지도를 하고 후배 패턴사 양성에 열정적으로 임해왔던 그는 1997년 제1회 ‘패션위크’ 전시회에 10점의 입체 패턴 작품을 출품한 후 패션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지난 2004년엔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명장 패션디자인 379호 자격을 부여받았다. 입체 패턴으론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명장이다.

국내 입체 패턴의 선구자이자 서완석 명장은 "좋은 옷을 만드는 데 디자인만큼이나 패턴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진영 기자

국내 입체 패턴의 선구자이자 서완석 명장은 "좋은 옷을 만드는 데 디자인만큼이나 패턴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진영 기자

“우리나라에서 세계적 디자이너 안 나오는 이유는...”

“옷이 언뜻 보면 괜찮아 보여도 입었을 때 괜히 불편하고 어딘가 형태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어요. 디자인의 문제라기보다 패턴의 문제인 경우가 많죠.” 서 명장은 좋은 옷을 만드는 데 디자인만큼이나 패턴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곤 대우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패턴사를 단순히 ‘숙련된 기술인’으로 대하는 국내 현실엔 안타까움을 표했다. 해외엔 패턴사 출신의 디자이너도 많다고 한다. 프랑스 여성복 브랜드 ‘알라이아’를 이끄는 디자이너 아제딘 알라이아가 대표적이다. 서 명장은 “패턴을 아는 디자이너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실루엣을 창조해내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나라에서 세계적 디자이너가 많이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패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시대에 따라 아름다운 옷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고, 체형도 변하는데 이를 옷에 정확히 반영하는 역할도 패턴사의 몫이다. “여성복 바지만 해도 과거보다 옆선이 굉장히 앞으로 나와 있어요. 엉덩이는 도톰하고 허벅지는 날씬해 보이기 때문이죠. 한국인의 체형도 많이 달라졌어요. 6.5등신 평균 체형에서 최근엔 7.5등신까지도 보고 있어요.”

서 명장은 정장 브랜드가 줄어들고, 스웨트셔츠나 청바지, 티셔츠처럼 캐주얼이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패턴의 중요성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오히려 캐주얼 룩일수록 실루엣이 중요하고 요즘같이 ‘오버핏(넉넉하고 크게 입는 경향)’ 스타일인 경우 패턴이 무너지면 자칫 벙벙하게 보이기 쉽다.

얼마 전엔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온라인 전용 의류 브랜드 ‘텐먼스(10MONTH)’와 협업 작업도 했다. 10개월간 입을 수 있는 기본 아이템을 선보이는 ‘텐먼스’는 무엇보다 편안하면서도 멋스러운 실루엣을 구현해야 했기에 서 명장 같은 패턴 전문가의 힘이 필요했다. 서 명장의 노하우가 돋보이는 ‘마스터 핏 슈트’는 텐먼스의 대표 상품이자 인기 상품이다. 지난달 22일 론칭한 텐먼스 남성복에도 서 명장의 손길이 더해졌다.

의류 브랜드 '텐먼스'의 모든 옷에는 서완석 명장의 손길이 담겨있다. 그 중 서 명장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마스터핏 슈트.' 사진 텐먼스

의류 브랜드 '텐먼스'의 모든 옷에는 서완석 명장의 손길이 담겨있다. 그 중 서 명장의 전문성이 돋보이는 '마스터핏 슈트.' 사진 텐먼스

좋은 옷은 보기만 해도 안다

40년간 옷을 만진 서 명장은 좋은 옷을 고르는 노하우로 “안감을 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해외 명품 브랜드의 옷을 뜯어보면 안감 마무리가 너무나 깔끔하다”며 “겉에 아무리 좋은 원단을 써도 안감이 엉망이면 옷감이 따로 놀고 움직임에 따라 함께 늘어나지도 않아 입는 사람이 불편하다”고 했다. 온라인상에서 옷을 많이 사는 요즘엔 만져 볼 수 없으니 “옷걸이에 걸어도, 마네킹에 입혀도, 사람에 입혀도 전체적 선이 튀어 보이거나 무너지지 않는 옷을 골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터뷰 말미, 한국 패션 업계 산 증인으로서 서 명장은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예전엔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 가 중국에 팔았지만, 요즘은 광저우에서 옷을 떼다 동대문에서 팝니다. 기술 인력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기 때문에 봉제 기술자 연령도 점점 높아지는 추세고요. 깊이 있는 인프라가 있어야 K-패션의 성장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