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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던 백신이 안온다…한국 덮친 최악의 '백신 민족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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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신종플루’ 사태 당시를 뛰어넘는 지정학적 (백신 확보)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망자가 29만명을 넘어섰던 지난해 5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내놓은 전망이다. 57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종플루보다 코로나19의 파괴력이 더욱 클 것으로 보이는 만큼 백신 확보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뒤를 이었다. 1년가량 흐른 지금 이 전망은 현실이 됐다. 각국이 백신 확보를 위한 자국 우선 원칙을 노골화하면서 세계 백신 공급망을 위협하고 있다.

“자국 먼저”…계약 안 지키면 수출 제한

전 세계 코로나19 백신의 약 60%를 만들어 내 ‘세계의 백신공장’이라 불리는 인도는 최근 “국내 수요가 우선”이라며 자국에서 생산되는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수출을 일시적으로 멈추겠다고 선언해 충격을 안겼다. 하루 5만명 넘는 신규 환자가 나오는 데다 이중변이 사례까지 확인되면서 2차 유행이 본격화했다는 분석이 나오자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국내 접종을 최우선으로 하겠단 것이다.

인도 암리차르 한 병원에서 30일(현지시간) 한 여성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인도 암리차르 한 병원에서 30일(현지시간) 한 여성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3차 유행을 겪는 유럽연합(EU)도 백신 물량이 달리자 수출 제한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제약사들이 유럽 안에서 생산한 백신을 역외로 수출할 때 회원국 승인을 받도록 해, 기존 구매 합의 때 약속한 물량을 EU 회원국에 충분히 배송했는지 따진다. 최근 이탈리아가 자국 내에서 생산된 AZ 백신의 호주 수출을 제한한 것도 AZ 사가 EU 내 계약 물량을 지키지 못한 데 따른 조치였다. EU는 수입 국가의 감염률, 접종률, EU로의 백신 원료 수출 상황까지 확인해 수출 승인을 내리기로 했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미국이 전 세계 백신의 27%를 생산해 중국에 이은 제조국이지만 수출 실적이 전무한 걸 두고 전문가를 인용,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외교적, 전략적 실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 내 반론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 헨리 올슨은“국가 지도자에게 글로벌리즘(세계통합주의)은 자국의 요구가 그들을 짓누를 때는 더 이상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백신 민족주의는 순진한 세계화에 대한 유용한 교정책이며 ‘아메리카 퍼스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 같은 비상사태에서 국제 관계보다는 내 나라의 이익이 먼저란 얘기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과거부터 백신은 선진국이 전 세계 시장을 점유해 예견된 일”이라며 “자국 내 공장도, 기술도 없는 이스라엘, 싱가포르가 비싸게라도 백신을 선구매하고 의료정보를 제공해서라도 백신을 확보한 이유”라고 말했다.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도 강대국들이 백신 사재기에 나서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남미 국가들은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망자 다수가 이들 국가에서 나왔다. 10년여가 지난 지금도 각국의 코로나19 백신 전략에 따라 접종률에서 희비가 갈린다.

지난 2009년 신종플루 백신 접종을 앞두고 거점병원인 서울 서초동 강남성모병원으로 배송된 백신. 중앙포토

지난 2009년 신종플루 백신 접종을 앞두고 거점병원인 서울 서초동 강남성모병원으로 배송된 백신. 중앙포토

백신 공급 차질 현실화 

자국 우선주의에 당장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일반인 접종이 시작되는 2분기(4~6월)를 사흘 앞두고 보건당국이 전한 소식은 당초 들어오려던 백신이 계획보다 뒤로 밀리고 물량도 줄었단 것이었다. 인도 수출 중단 등의 영향으로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3월까지 받으려던 AZ 백신이 4월 셋째 주에나 들어올 예정이다. 일정이 3주 밀린 데다 물량도 40% 줄었다. 추가로 2분기 도입 예정인 70만명 분도 기약이 없다. 얀센과 노바백스 등 다른 백신이 순차적으로 들어올 계획이지만 3분기나 돼야 본격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발등의 불은 2차 접종용으로 쌓아둔 물량을 푸는 식으로 끄고 있지만 2차 접종 일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마냥 당겨 쓰긴 어렵다.

연일 “당초 2분기 계획에 차질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하는 당국과 달리, 전문가들이 보는 전망은 밝지 않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이대로라면 4~6월은 200~300만명 맞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우려한다. 정부가 4~6월 목표로 한 인원은 1150만명이다.

코로나19 백신 도입 일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코로나19 백신 도입 일정.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박인숙 전 의원(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과 명예교수)은 페이스북에 “백신 공급이 원래 정부 발표 계획에 훨씬 못 미치고 있는데 대부분의 민간 전문가들이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라며 “올해 국내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기 어려워 보인다”고 썼다. 김우주 교수도 “미리 앞을 내다보고 전략을 짜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자국 내 백신공장과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어렵고 이젠 돈을 싸 가도 구하기 힘들다”라며 “11월까지 70%에 접종한다는데 내년이나 돼야 가능할 수 있다. 변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말했다. 국내 접종률은 1.64%(31일 기준)에 그친다. 아워 월드 인 데이터 31일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 100명당 백신 접종률은 1.62명으로 111위에 해당한다. 세계 평균은 7.24명이다.

만 75세 이상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하루 앞둔 31일 서울 성동구청 서울시 1호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 모니터링실에서 관계자들이 의자를 배치하고 있다. 뉴시스

만 75세 이상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하루 앞둔 31일 서울 성동구청 서울시 1호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 모니터링실에서 관계자들이 의자를 배치하고 있다. 뉴시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결국 국가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적어도 계약한 백신 만이라도 오도록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질병관리청에만 맡겨놓지 말고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국가정보원장, 각국 대사가 달려들어 범부처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백신 도입 검토해야 

백신 공급 불안을 고려해 러시아 스푸트니크V 백신까지 포함해 다양한 백신의 도입을 검토해야 한단 목소리가 나온다. 정기석 교수는 “결과가 너무 좋은 것으로 나와 의구심은 있지만, 더 정확한 자료를 요구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스푸트니크V 백신은 러시아가 지난해 3단계 임상 전 1,2상 결과로만 세계 최초로 승인한 백신이다. 지난달 초 의학 학술지 랜싯에 예방효과가 91.6%에 달한다는 3상 결과가 실려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국내의 한 제약회사가 위탁생산을 맡기도 했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이 30일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이 스푸트니크V 도입을 검토한다는 취지의 게시물을 올렸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31일 “공식적인 자료 제출 및 검토 진행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우주 교수는 “백신 공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뒷짐만 지고 보기보다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스푸트니크 백신을 고려해볼 만하다”며 “국내서 위탁 생산하면서 우리나라 사람 대상의 임상시험을 소규모라도 진행해서 자료를 만들어 신뢰를 쌓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카르카스에서 29일(현지시간) 근로자가 러시아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 V를 하역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카르카스에서 29일(현지시간) 근로자가 러시아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 V를 하역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단기적으로 보면 스푸트니크 확보 노력 등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며 “워낙 전 세계적인 문제라 최대한 노력하되, 노력한다고 해결되기 어렵다. 정 안되면 정부가 상황을 솔직히 설명하고 접종 일정을 조금 늦추는 식으로라도 최선의 대책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할 것을 대비한 전략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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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주 교수는 “1~2년 내로 끝날 상황이 아닌 만큼 지금이라도 공장을 증설하든 제2의 백신을 위한 능력을 갖추든 우리만의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선구매해서라도 백신을 조기에 확보해야 했는데 늦게 계약해 처음부터 실책했다”며 “향후 변이 바이러스에 대응할 업데이트 백신이 나올 텐데 개량 백신 확보에라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수연·이우림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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