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한겨울에도 위스키 잔을 찬물로 씻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13)

위스키 잔을 닦다가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집안일을 많이 돕는 아들은 아니었다. 뭉그적거리며 집안일을 하려고 하면, 이미 어머니가 집안일을 끝내 놓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점점 더 게을러졌고, 집안일은 어머니 독차지였다.

가끔 설거지를 도와드리는 게 집안일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거 같다. 선심 쓰듯이 설거지를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방에 누워 다음 끼니를 기다렸다. 주말이면 끼니마다 차려지는 밥상과 반듯하게 다려진 옷, 그리고 먼지 없는 책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집안일에 드는 어머니의 땀을 잘 몰랐다.

한겨울에도 설거지는 찬물로만 했다. 단 한 번도 뜨거운 물로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Public Domain]

한겨울에도 설거지는 찬물로만 했다. 단 한 번도 뜨거운 물로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Public Domain]

설거지는 어머니 방식을 따랐다. 밥공기는 말라붙기 전에 물을 받아두기, 반찬 양념이 덜 묻은 그릇부터 닦기, 기름 묻은 프라이팬은 키친타월로 먼저 한 번 닦아내기, 설거지가 끝난 뒤엔 싱크대 물기 닦아내기…. 그리고 한겨울에도 설거지는 찬물로만 했다. 단 한 번도 뜨거운 물로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른이 훌쩍 넘어 누군가의 집에서 뜨거운 물로 설거지하는 모습을 봤다. 한겨울이었는데, 싱크대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이 일으키는 하얀 김이 얼마나 생소하던지. 뜨거운 물은 설거지를 하는 내내 쏟아져 나왔다.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컬쳐 쇼크'라고 느껴질 정도의 일이었다.

아직 찬 바람이 남아있는 세월이지만, 찬 물로 잔을 닦는다. 그리고 그 잔에 위스키를 담는다. [사진 Public Domain]

아직 찬 바람이 남아있는 세월이지만, 찬 물로 잔을 닦는다. 그리고 그 잔에 위스키를 담는다. [사진 Public Domain]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설거지를 해봤다. 공기에 붙은 밥알의 흔적은 어쩜 그렇게 잘 벗겨지는지. 그리고 뜨거운 물에 닿은 손은 너무나 따뜻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설거지하면서 손이 얼어붙을 뻔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왜 어머니의 싱크대에선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육십이 넘은 어머니의 손은 탄력 없이 주름져 있었다. 억척스러운 어머니가 찬 물과 마주쳐 살아온 결과인 것만 같다. 어머니의 주름이 수없이 닿았던 그릇들 위에, 오늘 아침밥과 국이 담겼다. 아직 찬 바람이 남아있는 세월이지만, 아들은 찬 물로 잔을 닦는다. 그리고 그 잔에 위스키를 담는다.

위스키 인플루언서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