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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방패막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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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진경 자유기고가

김진경 자유기고가

풍진(Rubella)은 홍역과 비슷한 감염병이다. 주로 비말(침)로 전파된다. 림프절이 붓고 피부에 붉은 반점이 퍼지는데, 대부분 자연적으로 회복된다. 문제는 임신부다. 임신 초기에 풍진에 감염되면 태아의 90%가 선천성 풍진 증후군에 걸린다. 이 경우 태아에게 심장 기형, 뇌성마비 등이 생기거나 자궁 내에서 태아가 사망할 수도 있다. 풍진은 예방접종에 의한 항체 생성률이 95%에 이른다. 5%는 항체를 못 만드는데, 내가 그 5%에 포함된다.

과거엔 흑인에 백신 강제 접종 #이제는 왕족·정치인이 새치기

임신 전, 풍진 예방접종을 세 번 받았지만 항체가 생기지 않았다. 의사는 “어쩔 수 없으니 임신 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임신 초기에 스위스로 이민을 온 뒤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쳐다봤다. 유럽에서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던 2011년의 일이다. 다행히 임신 중 풍진에 걸리지 않았고,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내가 풍진에 걸리지 않은 건 마스크 때문만은 아니다. 내 주변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미 풍진 항체를 갖고 있어서다. MMR 접종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면역된 덕분에 풍진이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그것이 ‘풍진 위험군’이던 나를 보호했다. 몸 안의 항체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백신의 핵심적 미덕이다.

집단 면역은 여러 이유로 백신 접종을 못(안) 받거나, 받아도 항체를 못 만드는 사람까지 보호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인구의 일정 비율 이상이 면역되어야 하는데 그 비율은 질병마다 다르다. 홍역은 95%, 소아마비는 80%, 계절 독감은 30~40%다. 코로나19의 경우 70~80%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하지만, 아직 불명확하다. 내가 살고 있는 스위스에선 요즘도 하루 확진자가 1000명 넘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말 시작된 예방 접종은 지금까지 인구의 약 11%만이 받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접종 속도가 느린 이유 중 하나는 백신 물량이 제한적이라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누가 백신을 맞을 것인가. 대부분의 나라는 고령자와 기저질환 보유자를 접종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약자를 보호하며 집단 면역에 도달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원칙은 대개 ‘뒷구멍’을 동반한다.

스페인에서는 최근 공주 두 명이 아랍에미리트에서 백신을 맞아 큰 논란이 됐다. 각각 57세, 55세인 이들은 현재 스페인에서 접종 대상이 아니다. 이들뿐 아니라 정치인, 의료 종사자의 가족 등 수백명이 스페인에서 순위를 무시하고 백신을 맞았다. 스위스에서는 1월에 연방 정부 관료들이 비공개로 우선 접종을 받은 사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나 비난을 받았다. 이들 중 스위스가 정한 위험군(65세 이상)에 포함되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미국에서 천연두가 마지막으로 유행하던 19세기 말, 백신 접종은 파상풍 감염 같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라 다들 기피했다. 백인들은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을 강제로 먼저 접종시켰고, 흑인들에게는 머리에 총을 겨누고 접종을 강요했다. 약자를 희생시켜 얻은 집단 면역으로 특권층을 보호한 셈이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은 먼저 접종을 받는 게 특권이다. 선진국이, 왕족이, 정치인이 새치기를 한다. 거울처럼 반대되는 상황이지만 접종이 ‘힘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은 같다.

미국 언론인 율라 비스는 저서 『면역에 관하여』에서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라고 썼다. 그러니 백신을 거부하든, 접종 새치기를 하든 면역을 ‘사적 계좌’로만 보는 건 마찬가지다. ‘공동 신탁’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예컨대 접종 선택권조차 없는 16세 이하 영유아와 청소년, 건강상의 이유로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이 방패가 되어야 한다. 그게 선진국이다.

김진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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