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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헌법의 ‘미란다 원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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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효식 기자 중앙일보 사회부장
정효식 사회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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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 뿐 아니라 국민 기본권과 인권을 강화하는 내용도 담았다. 대표적인 게 헌법 제12조 국민의 신체의 자유 조항이다.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받지 아니하고는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하지 아니한다’는 5항은 통째로 신설됐다.

유명한 ‘미란다 원칙’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66년 판례로 확립해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가 이를 수용했지만 헌법에 명시한 나라는 한국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제헌헌법 때부터 체포·구금은 법률에 따라야 하며,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하고 변호인 조력권을 보장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87년 헌법은 여기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가 추가됐다.

당시 우리나라가 인권 선진국이라 미란다 원칙을 헌법에까지 실었을까. 아니다. 헌법 개정 불과 9개월 전인 1987년 1월 13일 자정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을 당시 경찰(치안본부) 대공 수사관 6명이 불법 연행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해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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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미란다 원칙을 명시된 뒤에도 불법 체포는 계속됐다. 2009년 6월 쌍용차 파업사태 당시 경찰이 현장에 있던 민변 노동위원장이던 권영국 변호사를 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체포할 당시 미란다 원칙을 고지 않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8년 뒤인 2017년 대법원은 권 변호사에게 무죄를, 거꾸로 당시 경찰을 불법체포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와 직권남용 체포)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유죄를 확정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수사 단계에서 구속사건 비율은 꾸준히 줄었다고 한다. 형사사건 중 구속 비율은 2016년 1.30%에서 2020년 0.98%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반면 법원의 재판 중 피고인 법정구속은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발을 투척하고, 8·15 집회에서 경찰을 폭행한 혐의(공무집행방해 등)로 구속기소된 정창옥(58)씨를 영장 기한(6개월)이 만료되자 세월호 유족 모욕 혐의로 다시 법정구속해 논란이 되고 있다. 재판 중 법정구속은 ‘정당한 이유없이 출석하지 않는 경우’로 제한한 대법원 예규도 어긴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법리상 문제가 없고 구속된 피고인은 추가 혐의로 구속을 연장하는 경우도 많다”는 입장이다. 이런 구속 재판 관행은 인권침해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헌법의 ‘무죄 추정의 원칙’을 어기고, 미결 구금 일수를 초과하는 중형 선고를 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원은 ‘유죄 추정 재판’을 하는 건가.

정효식 사회1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