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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인생 후반부의 삶, 동백꽃이 툭 떨어지듯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70)

동백꽃이 지고 있다. 몸뚱이 채 바닥에 툭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면 처연함과 함께 숭고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아낌없이 떠나는 모습, 지므로 더 아름다운 꽃. 만개했을 때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미나 글라디올러스가 질 때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사람의 삶을 동백에 견주어 생각해 본다. 나이 들어 인생 후반부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삶, 늙어가면서 더욱 품격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동백꽃에 견준다면 욕심을 버리고 내려앉음, 아낌없이 베풀고 떠나는 모습이 아닐까?

10여 년 전 건축의 건 자도 모르는 내가 강원도 화천에서 직접 집을 지은 후 언론 등에 자주 소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방문했다. 그들의 공통된 바람은 나처럼 전원에 집을 짓고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주에 내려와 해녀가 살다 떠난 폐가를 내 손으로 고쳐 생활하는 것이 여러 TV 방송에 나오자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감상(?)하고 간다. 이들의 공통된 바람 역시 자신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오래전 화천 집을 찾은 선배가 내게 “후배야, 주위에 땅 나온 거 있으면 알아봐 줘. 나도 당신처럼 집 짓고 여생을 보내고 싶어.” 내 대답?  “선배 꿈 깨세요!”였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나이 들어 인생 후반부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삶, 늙어가면서 더욱 품격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동백꽃에 견준다면 욕심을 버리고 내려앉음, 아낌없이 베풀고 떠나는 모습이 아닐까? [사진 pixabay]

나이 들어 인생 후반부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삶, 늙어가면서 더욱 품격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동백꽃에 견준다면 욕심을 버리고 내려앉음, 아낌없이 베풀고 떠나는 모습이 아닐까? [사진 pixabay]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남의 울안 복숭아가 더 실해 보인다고 나의 제주 생활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있다. “버릴 마음만 있으면 돼.” 오래전 나온 가수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노래가 십수 년 전 귀촌·귀농 붐을 타고 유행된 적이 있었다. 인구 소멸에 불안감을 느낀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귀농·귀촌 장려책을 들고나오며, 소위 ‘저 푸른 초원 위에의’ 꿈을 자극했다. 단언컨대 지금 대로라면 지자체의 입장에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요, 대부분의 귀농·귀촌인에게는 도로 염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본질은 벗어난 채 변죽만 울리기 때문이다.

농어촌의 현실을 보자. 이젠 농어촌의 자연환경이 저 푸른 초원과 같은 환경이 아니다. 거기에다 도시생활에서 각종 문화 혜택과 다양한 활동을 즐기던 현대 도시인이 열악한 문화예술환경,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금세 질식해 버린다. 귀농·귀촌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는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에서 이들의 성공사례를 포장해 침소봉대하는 것은 지자체나 귀농·귀촌인에게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자체는 지금까지의 하드 시스템 위주의 지원에서 탈피해 삶의 질이란 측면의 소프트 강화에 힘써야 한다. 그게 너무 미래지향적 일이며 요원한 바람이라면 인생 후반부에 전원생활을 꿈꾸는 자의 자세만이라도 바꾸어야 한다. 과거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으로 전원생활은 불가능하다. 단적인 예가 도시생활을 그대로 전원생활로 옮겨 놓으려 하는 점이다. 나이 들어 몸에 맞지 않는 크고 화려한 집과 살림, 도시에서나 즐겨야 할 의식주와 여가생활을 고집하니 적응에 힘들 수밖에 없고, 그런 태도를 접하는 원주민이나 환경이 그를 배척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역 귀경하는 사례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내가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버려라, 내려놓아라, 함께 하라’다.

요즘 들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에 매료된다. 그런데 뭇사람들이 『월든』에 열광하는 이유를 보면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월든』이 추구하는 욕심 없는, 소박한 삶을 통한 정신적 부의 추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남의 간섭 없는 힐링만을 그리워하니 말이다. 번잡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농어촌의 환경 속에서 진정한 정신적 힐링을 원한다면 ‘과거를 버려라’, ‘욕심을 내려놓아라’, ‘자연과 이웃과 함께하라’를 주문한다.

나는 ‘반딧불 초가집도 님(이웃, 자연)과 함께 살면 좋아’를 외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걸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라면 생각을 접으시라. [사진 pixabay]

나는 ‘반딧불 초가집도 님(이웃, 자연)과 함께 살면 좋아’를 외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걸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라면 생각을 접으시라. [사진 pixabay]

내친김에 남진의 노래 마지막 구절을 보자.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 이 또한 인생 3막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반딧불 초가집에 살만큼 다부진 생각을 못 할뿐더러 함께 살 ‘님’도 이미 님이 아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자신을 돌아보라. 나이 들어 스스로 상대방을 진정 배려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님으로 대접하고 사는가?

오래전 우수 영업사원들에 해외여행 특전을 부여하면서 부부동반을 권장한 적이 있었다. 오후에 내 방을 찾은 영업사원들이 그걸 재고해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집에서도 귀찮고 보기 그런 배우자와 해외여행을 함께 하기는 싫다는 것이었다. 나만 고집하고, 내 욕심만 차리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는 삶의 태도가 상대에게 배척을 당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닌지. 가족에게조차 말이다. 그러니 그런 자세로 귀농·귀촌해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전원생활 하겠다고? 그렇기에 꿈 깨시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진정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인생 후반부의 삶을 영위하고 싶은가? 두 가지를 실천하라. 첫째, 인생 2막에 가졌던 욕심과 탐욕을, 경쟁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동백꽃이 툭 떨어지듯. 둘째, 이웃과 함께해라. 여기서 이웃은 원주민뿐만 아니라 자연도 포함된다. 일본 속담에 ‘튀어나온 못, 정 맞는다’라는 말이 있다. 저만 살겠다고 고개 내미니 얻어맞을 수밖에.

인생 후반부 삶의 자세는 뭐니뭐니해도 함께 하는 자세이다. 요즘 들어 제주프로젝트가 자주 소개되면서 찾는 이들 중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 나는 ‘반딧불 초가집도 님(이웃, 자연)과 함께 살면 좋아’를 외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걸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라면 생각을 접으시라.

푸르메재단기획위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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