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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인생 3막, 얕은 바닷가 떠도는 늙은 해녀처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69)

옥색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주황색 테왁. 하얀 물보라를 뿜어 올리며 솟구치면서 “호이이”하고 내뱉는 숨비소리. 이것만을 든다면 얼마나 낭만적 풍광인가.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그리는 그림이다.

그러나 해녀의 삶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가슴 쥐어짜는 아픔이 있다. 이제는 힘에 부쳐 얕은 바다 언저리에서 가쁜 숨을 내뱉으며 힘들어 한다. 힘들어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아 한창 나이의 해녀 물질을 그리워하는 할망 해녀를 보면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

제주 해녀라고 다 같은 해녀는 아니다. 제주 해녀엔 상군과 하군, 그 하군 축에서도 똥군 해녀라고 불리는 호칭이 있다. 쉽게 얘기해 비교적 먼바다, 깊은 곳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상군 해녀라고 한다면 이제는 가까운 바다에서만 물질이 가능한 해녀를 하군이라 칭한다. 어린 수습 해녀를 거쳐 육체적으로나 물질 능력으로나 최고조에 이르면 그가 상군 해녀가 되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 육체적, 실력이 저하되면 차차 하군 해녀가 되는 것이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 현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면 하군 해녀인 것이다.

물질을 마치고 나오는 해녀들. 수확물이 변변치 못한 하군 해녀는 도움을 줘도 처음에는 반가워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한단다. 그러나 곧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게 상수의 삶이다. [사진 한익종]

물질을 마치고 나오는 해녀들. 수확물이 변변치 못한 하군 해녀는 도움을 줘도 처음에는 반가워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한단다. 그러나 곧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게 상수의 삶이다. [사진 한익종]

하군 해녀가 되면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상군 해녀가 물질하기 쉬운 곳을 이들에게 양보하지만 그에 맞게 수확량은 형편 없이 떨어진다. 그러나 모두 그러려니 한다. 나이 들어 물질하는 것 자체가 그나마 다행이라는 체념에 따른 대우며 호칭이다. 그렇지만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측면에선 오히려 나이 든 해녀가 상군 해녀가 아닌가 싶다. 젊었을 때를 생각하고 무리해 깊은 바다, 먼 바다로 나가는 욕심을 부리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그렇기에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나이에 걸맞은 물질을 하는 해녀, 그게 상수 아닌가.

몇 해 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국립공원 내 사망 사고 유형을 밝힌 게 생각난다. 국립공원 3대 사망사고의 유형이 북한산국립공원, 휴일 오후 1시에서 5시 사이, 50대 이후 남성이란 결과를 보면 과거의 욕심과 객기를 버리지 못하고 무리수를 두기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삶의 이치도 그렇지 않을까? 상군과 하군, 상수와 하수의 차이 말이다. 바둑에도 상수와 하수가 있다. 바둑에서 상수와 하수의 차이는 곧 버림, 희생에 있다고 한다. 자신의 돌을 희생시키지 않고 바둑을 두려고 하는 건 바보의 생각이며 상수는 돌을 버리려 하고 하수는 돌을 아끼려 한다는 표현을 들은 적 있다. 버릴 때, 내려놓을 때를 알고 그를 지키는 것이 상수의 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옛 고집을, 옛 욕심을 내려놓지 않은 것은 인생의 하수나 하는 짓이라는 걸 웅변해 주는 대목이다.

인생 3막을 살아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치관을 상수와 하수에 비추어 얘기해 보자. 인생전반부 가졌던 부와 지위와 명예를 고집하면서 남과 비교해 우월감에 사로잡혀 무위도식(?)하는 삶, 이게 상수의 삶일까 하수의 삶일까? 은퇴 후 인생 3막에는 인생 2막인 직장에서 가졌던 명예와 지위는 사라지고 그나마 남는 게 경제적 여유인데 이를 가지고 우쭐해 하는 삶은 하수의 삶이다.

예전에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했던 배우 강수연이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일본말로 얼굴이나 우리는 흔히 명예, 자존감으로 표현함)가 없냐”라고 말한 후 영화 ‘베테랑’의 대사로 쓰여 인구에 회자되는 표현이 있다. 단적으로 얘기해 가오를 지키는 것이 상수의 태도다. 『논어』 학이편에 빈이무첨, 부이무교(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다)라는 글이 있다. 돈 좀 있다고 뻐기고 무위도식하는 자는 교만한 자요, 가진 것은 적지만 이웃과 함께 나누며 자신의 격조를 지키는 사람은 비굴하지 않으니 어느 편이 상수요 어느 편이 하수인지는 명약관화하다. 아무리 돈이 인격이라고 치부하는 세상이지만 돈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상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 몇 년만 있으면 우리 인류가 이제껏 겪지 못했던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베이비부머 세대로 일컫는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우리 세대가 산업 일선에서 완전히 퇴출당하는(?) 시간이 오고, 이들에 대한 노후 걱정이 전 세계적 이슈가 되는 것이다. 한때 산업의 역군이며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세대,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를 다졌던 세대라고 칭송받던 우리 세대가, 지금대로 끝난다면 우리 후손들이 돌이켜 가장 비난할 세대라는 나의 혹평이 실현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생 후반부를 사는 사람이 후손에게 본받을 만한 세대로 칭송받으며 상수로 살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상수의 삶, 하수의 삶을 가르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사진 pixabay]

인생 후반부를 사는 사람이 후손에게 본받을 만한 세대로 칭송받으며 상수로 살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상수의 삶, 하수의 삶을 가르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사진 pixabay]

상수와 하수의 삶을 가르는 가늠자는 딱 하나다. 혼자 살 것인가 함께 살 것인가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자. 남 보기에 수더분한 옷차림과 검소한 생활, 그러나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사람, 사실은 거부이면서 타인의 존경과 흠모를 받으며 행복한 노후를 사는 사람을. 또는 가진 것은 남 부러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끊임없이 투쟁적이며 자신만을 위해 구린내 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놀라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나만 살겠다는 사람과 많이 가진 사람의 행복지수는 오히려 낮고, 베풀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더 높다는 점이다. 여러모로 따진다면 다른 이와 함께 하면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상수요, 저 혼자 잘 살겠다고 경쟁적으로 사는 사람이 하수의 삶이 아닐까? 상수는 나누면서 행복해하는 사람이며 하수는 아무리 가져도 불행해 하는 사람이다.

얼마 전 자신의 재산 5조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단칸방 성공신화, 기부왕으로 알려진 카카오 김범수 의장이나 5500억 상당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배달의 민족 창업자 김봉진 의장을 보면 나로서는 그들이 상수중의 상수라는 생각이 든다. 가졌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기부하니 말이다.

부, 지위, 명예를 남 부럽지 않게 가졌으면서도 자신만 잘살겠다고 우기다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은 하수 중의 하수다. 김범수, 김봉진 이 두 사람이 소위 오팔세대, 베이비부머 세대가 아닌 게 아쉽다. 그러나 오팔세대로 일컬어지는 인생 후반부를 사는 사람들이 후손들에게 본받을 만한 세대로 칭송받으며 상수로 살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상수의 삶, 하수의 삶을 가르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푸르메재단기획위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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