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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떠나면 어디서 한국 록 역사 듣나…아카이브K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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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서 한국형 발라드의 계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수들. [사진 SBS]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서 한국형 발라드의 계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수들. [사진 SBS]

“신중현 선생님이 편찮으신가 봐. 그분이 안 계시면 누구한테 한국 록의 역사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까. 음악인들 얘기는 다 술자리에서 말로만 전해 듣고 제대로 된 기록이 없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하다.”

121명 출격해 54개 무대 꾸민 ‘아카이브K’ #동아기획부터 K팝까지 대중음악사 담아 #아카이빙 전문 제작사 설립 최정윤 대표 #“방송 음악감독 하며 30년간 가요에 빚져 #이태원·학전 프로젝트 계속 이어나갈 것”

SBS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의 출발점이다. 몇 년 전 SBS 최영인 예능본부장과 최정윤 음악감독, 윤일상 작곡가가 나눈 얘기가 모티브가 되어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기록하는 다큐음악쇼가 제작된 것. 꼬박 2년간 대중음악 종사자 207명을 만나 인터뷰한 분량만 1만 5012분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10회 동안 121명의 아티스트가 출격해 54개의 무대를 꾸미고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했다. ‘K팝스타’ ‘더 팬’ ‘판타스틱 듀오’ 등 음악 예능에서 잔뼈가 굵은 최 감독이 아예 아카이빙 전문 제작사를 설립해 총대를 멨다. 쿨리지코너인베스트먼트·KC벤처스 등 벤처캐피털의 투자도 이어졌다.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를 제작한 일일공일팔의 최정윤 대표. 긴 시간 축적된 자료를 기록, 아카이빙 한다는 뜻에서 시계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를 제작한 일일공일팔의 최정윤 대표. 긴 시간 축적된 자료를 기록, 아카이빙 한다는 뜻에서 시계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4일 서울 성수동 사무실에서 만난 최정윤 일일공일팔 대표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모르고 덤볐다”고 말했다. 그는 예중·예고를 나와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방송국 음악감독으로 30년간 밥벌이를 한 사람으로서 대중음악에 대한 ‘빚진’ 마음을 갚고 싶었다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클래식을 전공하면 가요와 팝송을 듣는 게 금기시됐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김현식·들국화 음악을 처음 들려줬는데 큰 충격을 받았죠. 와 이건 뭐지. 전혀 다른 세상이구나. 그 후로 다른 분들이 만들어놓은 훌륭한 음악을 쉽게 사용하면서 내가 이분들을 위해서 한 일은 하나도 없네. 이제는 빚 갚음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현진영은 댄스가수? 춤도 추는 힙합가수”

대중음악 역사와 관련된 논문과 서적부터 훑어봤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영화 등 다른 장르에 비해 편수가 현저하게 적을뿐더러 내용도 음악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시대상이나 표현 양식 등 부가적 요소가 더 많았기 때문. 동물원 박기영의 석사 논문을 구해 보고 인터뷰를 병행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사의 변곡점을 찾아 나갔다. “처음엔 발라드·댄스 등 장르로 접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현진영씨를 댄스 가수로 지칭했더니 본인은 ‘춤도 잘 추는 힙합 가수’라고 하더라고요. 장르 구분 자체가 너무 모호한 거죠. 그래서 사람을 쫓다 보니 비슷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 하나씩 보이더라고요. 인터뷰차 만난 동아기획 뮤지션이 당시 녹음을 전담했던 서울스튜디오를 소개해 주기도 하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퍼즐이 하나씩 맞춰져 갔죠.”

‘바다를 건넌 K-Pop’을 주제로 이야기 하고 있는 H.O.T. 멤버들. [사진 SBS]

‘바다를 건넌 K-Pop’을 주제로 이야기 하고 있는 H.O.T. 멤버들. [사진 SBS]

‘바다를 건넌 K-Pop’ 편 인터뷰에 참여한 방탄소년단. [사진 SBS]

‘바다를 건넌 K-Pop’ 편 인터뷰에 참여한 방탄소년단. [사진 SBS]

1~2회는 한국형 발라드의 계보로 시작했지만 3회는 90’s 나이트 DJ와 댄스음악, 4회 이태원 문나이트, 5~6회 홍대 앞 인디뮤직, 7회 대학로 학전 소극장, 8회 동아기획 사단, 9~10회 바다를 건넌 K-Pop 등 7개 주제로 나누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세계 무대를 휩쓸면서 그들의 성과에 집중하는 분석은 많아요. 하지만 K팝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기까지는 여러 모멘텀이 있었죠.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로 중국에서 한류 열풍을 불러온 안재욱부터 시작해서 H.O.T.·보아·원더걸스·비 등이 하나씩 주춧돌을 쌓아나갔고요.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큰 인기를 끌면서 유튜브가 라디오 못지않게 중요한 플랫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빌보드 등 해외 주요 차트도 집계 기준을 바꾸면서 그 수혜를 입게 됐지요.”

“문나이트·학전…변곡적 된 공간들”

방송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동창회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문나이트에서 발굴돼 현진영과 와와 1기로 활동했던 클론의 구준엽·강원래, 2기 바통을 이어받은 듀스의 이현도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UV가 부르는 듀스 커버 무대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90년대 댄스 음악의 흐름이 그려졌다. TV 대신 라디오와 라이브 공연을 고집했던 푸른하늘·빛과소금·장필순·박학기·함춘호·김현철 등 동아기획 사단도 총출동해 합동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지금은 힙합에서 주로 쓰는 용어가 됐지만 그들은 일찌감치 신인을 추천하며 일종의 ‘크루’를 결성했던 셈. 동아기획의 옛 주소이자 예전에 살던 내수동 110-18에서 회사 이름을 따온 최 대표는 “동아기획과 학전을 한 회씩 다룰 수 있어서 뿌듯했다”고 말했다.

‘대학로 학전 소극장’ 편 녹화를 마친 가수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 SBS]

‘대학로 학전 소극장’ 편 녹화를 마친 가수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 SBS]

‘동아기획 사단’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 SBS]

‘동아기획 사단’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 SBS]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 역시 학전 김민기 대표를 꼽았다. “아동극을 계속하는 이유를 여쭤봤는데 ‘아이들에게 엄마의 모유를 계속 먹여주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금전적 보상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본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굉장히 와 닿았어요. 제일 처음 찾아뵀는데 그동안 모아놓은 학전 공연 자료를 모두 다 제공해 주셔서 큰 힘이 되기도 했고요. 6mm, 8mm, VHS 등 다양한 포맷으로 돼 있는 자료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최 대표는 “대학로 공연 부흥기를 이끌었던 소극장이 많이 사라져서 아쉽다. 학전만큼은 꿋꿋이 자리를 지킬 수 있길 바란다”며 “더 많은 가수와 관객이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학전 되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조선왕조실록처럼 새 이야기 보고 되길”

그는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는 14일로 끝이 나지만 일일공일팔의 아카이브K는 이제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다루고 싶었는데 못 다룬 주제도 너무 많아요. 조용필·나훈아·서태지 등 인터뷰 하고 싶었는데 아직 못 만난 분들도 많고요. 가수뿐 아니라 작곡가·작사가·연주자 등 뒤에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고 싶고요.” 문나이트 외에도 이태원 음악 이야기를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고 싶은 마음에 이미 다음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등 관심을 갖는 플랫폼도 여러 곳이라고 귀띔했다. “그동안 특정 방송국, 혹은 기획사, 뮤지션을 앞세운 기획안은 많았는데 아무래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언저리’에 있는 저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은 것 같아요.”

‘이태원 문나이트’ 편에서 펼쳐지던 쇼다운을 재현한 모습. [사진 SBS]

‘이태원 문나이트’ 편에서 펼쳐지던 쇼다운을 재현한 모습. [사진 SBS]

‘홍대 앞 인디뮤직’ 편에 출연해 함께 무대를 꾸민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사진 SBS]

‘홍대 앞 인디뮤직’ 편에 출연해 함께 무대를 꾸민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사진 SBS]

아카이브K 챌린지를 통해 팬들이 보내준 자료도 축적해 나가고 있다. 아티스트와 사용자들이 함께 자료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집단지성 온라인 플랫폼 ‘우리가요’도 만들 계획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한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는 “그동안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 역사로 남는 게 아니라 소멸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며 “아티스트별로 자료를 아카이빙해 조력자 혹은 관련 계보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촘촘히 연결돼 새로운 2차 콘텐트 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풀을 구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이 디지털화된 이후 이를 토대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생겨난 것처럼 우리가요를 토대로 새로운 음악과 이야기가 발견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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