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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재준의 의학노트

절망하는 의사, 희망하는 가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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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 의학교육실장

의사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경우는 환자나 가족들로부터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다. 미국 내과의사 1500명이 참여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1년 동안 환자로부터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평균 열 번 받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의 가족들로부터 서른 번 정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한 해에 마흔 번쯤 환자의 여명에 대한 질문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상당히 괴롭다.

환자의 남은 수명 예측은 #숙련된 의사들도 쉽지 않아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금물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면

연구에 참여한 의사들의 60%가 환자들의 남은 수명을 예측하여 말해주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응답했다. 59%는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얘기했다. 또 90%는 예측이 틀려 환자의 신뢰를 잃게 될까 봐 염려했다. 그래서인지 의사들의 44%는 여명에 대해 먼저 설명하지 않고 환자가 물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환자 가족들은 의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믿지 않는다. 미국 피츠버그 의대 더글러스 화이트 교수의 연구를 보자. 연구팀은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는 환자의 가족들을 연구에 초대하여 10분짜리 동영상 두 편 중 하나를 보여 주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환자의 상황은 동일했는데, 의사가 가족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이 달랐다. 첫 번째 영상에 등장하는 의사는 “환자분이 회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돌아가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영상에서는 “환자분이 회복될 가능성은 10%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돌아가실 가능성이 90% 가량이나 된다는 뜻입니다”라고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설명했다.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조만간 돌아가실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들은 환자 가족들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의사가 사망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하는 첫 번째 영상을 본 가족들의 22%가, 그리고 생존 확률이 10% 정도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의사가 등장하는 두 번째 영상을 본 가족들의 26%가 환자는 결국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사가 뭐라고 하건 가족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의학노트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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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화이트 교수는 후속 연구를 통해 왜 가족들이 의사의 설명을 믿지 않는지 확인해 보았다. 연구팀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가족 50명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중환자실에서 의사들이 환자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얘기할 때 가족들은 이 말을 믿어야 하나요?” 이 질문에 무려 환자 가족들의 88%가 의사들의 예측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왜 그럴까? 화이트 교수팀은 가족들을 자세히 인터뷰한 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이유를 정리했다. ① 회복 여부에 신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② 원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③ 의사의 틀린 예측을 예전에 경험했기 때문이다. ④ 담당 의사가 미숙해 보이거나 의사들마다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각양각색의 이유로 의사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누구 예측이 더 정확할까? 미국 듀크 의대 크리스토퍼 콕스 교수팀의 연구를 참고하자. 이들은 중환자실에 오래 입원하여 기관절개술까지 받은 환자 126명의 담당 의사와 가족을 따로 면담하여 해당 환자의 1년 후 생존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의사들의 43%가 자신이 맡은 환자가 1년간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가족들은 93%가 1년 후에도 환자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년이 지난 후 연구팀은 환자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해 예측과 맞추어 보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실제로는 126명 중 70명, 즉 56%의 환자들이 중병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환자 가족들이 믿었던 93%보다는 훨씬 못했지만, 의사들이 예상한 43% 보다는 나았다. 그러니 의사들은 실제보다 부정적으로 예상하고, 가족들은 지나치게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 전 부친상을 겪었다. 썩 건강하신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두 해는 거뜬하게 견디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금 돌아보면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적도 있으니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는 상태였다. 수많은 환자들의 ‘사망선고’를 한 경험이 있는데도 부친의 상태를 턱없이 낙관했으니 이번만큼은 절망하는 의사가 아닌 희망하는 가족 역할을 한 셈이다. 자식이라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의학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