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삭 감독 “학점 따려 들었던 영화수업이 삶을 바꿨다”

중앙일보

입력 2021.03.02 00:02

지면보기

종합 02면

1980년대 한인 이민자 가족의 따뜻하고 생생한 미국 정착 분투기를 그린 영화 ‘미나리(MINARI)’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제78회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쥐었다. 재미교포 2세 정이삭(리 아이작 정·43) 감독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보편적이면서도 놀라운 이민자들에 관한 이야기”(워싱턴포스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나리’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는 이민가족
외국어 아닌 진심과 사랑의 언어”

‘기생충’ 이은 쾌거, 윤여정도 화제
작품상 안 올려 인종차별 논란도

이날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의 베벌리 힐튼호텔과 뉴욕시 록펠러센터 레인보룸에서 나눠 열린 시상식은 코로나19 때문에 참석자를 최소화했다. 화상으로 수상 소식을 접한 정 감독은 출연진·스태프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모든 미나리 가족에게 고맙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자택에서 딸을 껴안은 채 미소 띤 모습으로 “여기 함께한 딸이 이 영화를 만든 큰 이유다. 미나리는 가족 이야기다.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가족의 이야기이고, 그 언어는 단지 미국의 언어나 그 어떤 외국어가 아니라 진심의 언어(Language of Heart)”라며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이 ‘사랑의 언어(Language of Love)’로 말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특히 올해는”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선댄스 등 포함 75관왕, 윤여정 26관왕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비대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외국어영화상을 탄 정이삭 감독이 딸을 안고 소감을 말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비대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외국어영화상을 탄 정이삭 감독이 딸을 안고 소감을 말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정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로 이주한 30대 부부와 자녀(남매), 이들을 돕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할머니의 희망과 좌절, 의지의 여정을 담았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후 골든글로브까지 총 75관왕(157개 부문 노미네이트)에 올랐다. 특히 외할머니 순자 역의 윤여정은 연기가 주목받아 각종 영화제·시상식에서 총 26관왕에 올랐다. ‘미나리’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가 주관하는 골든글로브에서 주요 대사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란 이유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부문으로 분류돼 인종 차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26일 정 감독과의 인터뷰 기사에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고향으로 돌아온 감독’이란 제목을 달았다. 여기에서 고향은 정 감독이 성장기를 보낸 미국 아칸소주와 그의 뿌리인 한국을 모두 의미한다.

정 감독이 영화감독이 된 건 우연이다. 그는 작가 지망생으로 예일대에 입학했지만 이내 꿈을 접었다. 그는 NYT에 “예일대에서 지방 할당 쿼터를 채우기 위해 아칸소주 출신인 나를 겨우 입학시킨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정도로 다른 학생들은 우수한데 내 실력은 끔찍했다”고 회상했다. 영화를 즐겨 보는 타입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기숙사 룸메이트가 ‘7인의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보길래 ‘대체 왜 저런 영화를 좋아하지’라고 생각했다”고 NYT에 말했다.

그는 의대에 진학하기로 하고, 인문학 필수 학점을 채우기 위해 영화 수업에 등록했다. 매주 과제로 실험적 동영상을 찍으면서 그는 조금씩 영상 제작에 흥미를 느꼈고, 곧 ‘7인의 사무라이’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화양연화’ ‘중경삼림’의 왕자웨이(王家衛) 감독 작품에 빠져들었다. 그는 NYT에 “영화의 길에 들어선 건 내게 마치 인생의 개종과 같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의대 대신 유타대로 진학해 영화를 전공했다. 그는 “하루에 여러 편 영화를 계속 봤다”며 “마치 영화로 수련하는 수도승 같았다”고 말했다. 졸업 후 첫 장편영화는 2007년 심리치료사인 부인 발레리와 함께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문해 찍었다. 르완다 현지어로 종족 간 화해를 그린 ‘무뉴랑가보’로 칸영화제 등에 이름을 알렸다.

‘미나리’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미나리’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후 그는 모교인 유타대의 한국 인천 캠퍼스에서 교편을 잡았다. 정 감독은 NYT에 “마흔이 되어가면서 인생에서 변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고 좀 더 실용적인 걸 해보자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미나리’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배우 윤여정씨도 인천에 살며 만났다. 윤여정 배우는 NYT에 “정 감독은 꼭 내 아들 같았다”며 “모든 영화의 촬영 첫날은 엉망이기 마련인데, 정 감독은 굉장히 침착했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전초전으로 불리는 골든글로브에서 한국계 영화가 2년 연속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골든글로브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가 외국어영화상을 탔고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에 올랐다. 아카데미는 지난해부터 외국어영화상의 이름을 바꿔 국제영화상으로 시상하고 있고, 외국어 사용 여부는 주요 부문 수상 기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카데미 후보 발표는 오는 15일, 시상식은 다음 달 25일이다.

미국 매체 데드라인에 따르면 북미 개봉 3주 차 주말을 보낸 ‘미나리’는 추가 상영 요청에 따라 극장을 늘려가고 있으며 누적 매출 25만1000달러(약 2억8200만원)를 올렸다. 국내에선 3일 개봉한다.

중국계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가 작품상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은 중국계 미국인 감독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에 돌아갔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등 170관왕에 이르는 수상 퍼레이드다. 자오는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은 음악상과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지난해 대장암 투병 끝에 숨진 흑인 배우 채드윅 보즈먼이 ‘마 레이니즈 블랙 바텀’으로 남우주연상(영화 드라마 부문)을 받았다.

강혜란·전수진·나원정 기자 theothe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