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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이제는 산업이다] 외국은 변신, 한국은 안주

중앙일보

입력

"돈이 많다고 병원 경영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환자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일본 가메다병원의 가메다 도시타다(龜田俊忠)이사장은 '고객중심'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일본도 규제가 심하지만 최고의 서비스를 위해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프로정신이 인구 3만여명에 불과한 지바(千葉)현 가모가와시의 가메다클리닉을 종합병동(858병상) 이외에 간호전문학교까지 갖춘 종합 의료단지로 키워냈다.

이곳에 가면 의사.간호사 등 가운 입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직원들은 철저히 고객의 동선과 분리된 별도 통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복도.로비에서 마주칠 일이 없다. 환자들이 병원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세계 최대의 미용성형 병원인 가나가와클리닉은 32개의 미용성형병원과 두 개의 라식센터를 운영해 한 해 20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이 병원은 광고를 워낙 많이 해 아예 광고회사를 직접 차렸고 전국 각지의 신규 병원부지를 물색하는 부동산 전문가만 5명이다. 지난해 일본 고액납세자 랭킹 9위에 오른 야마고 다이스케(山子大助.55)원장은 "일본 의료시장에서도 경쟁의 원리가 중요해질 것이며 '함께 잘 살자'는 전통은 유지되기 힘들다"고 단언했다.

싱가포르의 국립병원인 탄톡셍 병원의 원장 겸 최고경영자(CEO) 린쉐원(林學文.45)은 산부인과 의사이면서 미국 UCLA의 경영학석사(MBA)다. 그는 "국립병원이지만 신규 투자도 민간병원 못지않게 빠르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병원 경영을 보면 정부 규제만 탓할 게 아니다. 일부 대형병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먹구구식이다.

충북의 소도시에 있는 A병원. 환자 감소로 인해 2002년 초 70억원의 부채를 안고 문을 닫았다. B씨는 빚을 떠안고 이 병원을 인수했다. 유능한 의사였던 B씨는 진료만 잘하면 병원이 살아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되레 악화됐다. 노조를 설득하지 못해 병원 규모를 줄이지도 못했다. 결국 부도를 맞았다.

이 병원 직원 安모(45)씨는 "시장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줄 아는 전문경영인이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지가 전국 39개 대학병원장의 학력.경력을 조사한 결과 의학 외에 다른 공부를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MBA를 딴 사람도 전무했다. 기획실장 경력을 쌓은 경우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학병원이 이 정도니 중소병원은 말할 것도 없다.

영동세브란스 김광문 원장은 "의사 원장들의 경영 마인드가 떨어지는 것이 중소병원들의 도산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의사만이 병원을 열도록 제한하고 있는 의료법 규제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병원들은 주식회사형 병원 허용 등 시장개방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찬성하지만 속으로는 반대한다. 그동안 의료는 개방과 무관한 분야라고 생각해 국내시장에 안주해 왔기 때문이다.

모 체인병원 대표는 "개인 병원으로 성공해 비영리 의료법인을 세우는 의사 가운데 가족.친지에게 경영을 맡기다 부실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정철근.이승녕.권근영 기자, 오병상 런던 특파원, 유권하 베를린 특파원

◇ 전문가 진단

▶안후이건(安惠根)상하이 민항병원장
"한국의 의료수준은 아주 높다. 하지만 영리법인은 안 되고 의사만 의료업을 하도록 하는 제도는 중국이 이미 벗어던진 방식이다."

▶이종철 삼성서울병원장
"우리 의료계의 인적 자원과 기술은 수준이 높지만 경영은 영세한 구멍가게 수준이다."

▶박용현 서울대병원장
"소수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하거나, 다수에게 낮은 질의 의료서비스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하는 것은 적절한 투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김광문 영동세브란스병원장
"공공의료는 공공병원이 맡아야지 지원도 없으면서 사립병원을 왜 규제하나."

▶박인출 보건산업벤처협회장
"의료 평준화로 힘든 것은 서민일 뿐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간다. 있는 사람 좋은 병원에 가게 하고 남는 재정을 서민에게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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