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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테러 20주년] 아웅산 테러 20년…현장엔 잡초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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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테러 20주년이다. '아웅산 묘소'에 뿌려진 한국인 17명의 피는 바짝 말라붙어 세월의 바람 속에 흩어졌고, 남북 화해를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당시 사건은 아득히 먼 시절의 옛 이야기로 변해가고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당시 한반도를 흔들었던 사건의 현장을 되돌아본다.[편집자]

"츠노네 머사인부(나와 상관 없는 일이다)."

지난 8일 오후 미얀마 수도인 양곤 북쪽의 아웅산 묘소에서 2백여m 떨어진 바힌흐닛 초등학교 앞. 어린이들의 하굣길을 지도하던 40대 초반의 여교사는 '아웅산 테러 사건'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무뚝뚝한 답변을 던지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꼭 20년 전인 1983년 10월 9일. 이 묘소에서는 한반도를 순식간에 전쟁 일보 직전의 벼랑으로 몬 '아웅산 테러'가 발생했었다. 남북 대치가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했을 당시 북한은 버마를 친선방문한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3명의 공작원을 현지로 밀파했다.

全전대통령 일행의 아웅산 묘소 방문일정을 알아낸 공작원들은 참배소 천장에 원격 폭탄을 설치했다. 오전 10시28분 벼락 같은 소리와 함께 폭탄은 터졌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화약연기 속에서 서석준(徐錫俊)부총리, 이범석(李範錫)외무장관과 취재기자 등 17명이 피를 뿌리며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수행했던 이기백 당시 합참의장 등 13명도 나뒹굴었다.

대통령이 탄 본대 차량이 나타나기 전에 현장 실무진의 착오로 나팔이 먼저 울렸고 이를 진혼나팔로 착각한 공작원들이 폭탄의 버튼을 누른 것이다. 서남아.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였던 버마에서 벌어진 참변을 뒤로 하고 全대통령은 급거 귀국했고 이후 남북 간엔 시퍼렇게 날선 칼 같은 긴장이 짙게 깔리게 됐다.

한국과 미얀마, 그리고 세계를 경악시켰던 이 사건은 한국의 젊은 세대에서와 마찬가지로 5천2백만 미얀마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아웅산 묘소도 크게 변했다.

미얀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이름을 딴 성역이었던 이 묘소는 더 이상 성지(聖地) 대접을 받지 못해 아예 문을 닫았다. 묘소는 새빨간 지붕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뒤덮이고 1천5백평 규모의 묘역엔 잡초만 무성하다.

참배가 시작되는 뒷문에서 묘역까지 20m 길이 계단 양쪽엔 빨간 히아신스들이 무정한 인심을 탓하듯 어수선하게 피어있다. 한 40대 미얀마인은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치가 군사정권에 맞선 결과"라고 소곤거렸다. 묘역 주변엔 관광객들의 접근조차 엄격하게 금지된다. 사진기를 슬며시 들이밀고 묘역 안을 찍자 경비병들이 요란하게 호루라기를 분다.

전두환 대통령이 폭발음을 듣고 황급히 차를 돌렸다는 피 로드 교차로.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묻고 그 위에 60t 금으로 치장해 건설한 쉐다곤 파고다(탑)가 바라보이는 6차로 도로는 시커먼 매연을 연신 내뿜는 중고 자동차들로 움직이는 폐차장이 돼 있다. 시내의 중고 자동차 행렬, 제한 송전, 짓다 만 건물 등은 미얀마의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한폭의 시름없는 풍경화다.

하지만 경제난 속에서도 미얀마 지식층에겐 아웅산 테러의 충격이 생생히 남아있다. 특히 50대 이상은 '남북한은 언제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라는 잠재의식마저 갖고 있다.

한국 불법 체류 경험을 갖고 있는 30대 초반의 A씨는 "내가 한국에 일하러 간다고 했더니 공직자였던 아버지가 '2000년이 되기 전에 꼭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북한이 미사일을 잘못 발사해 한반도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고 명문대학인 양곤대 출신의 B씨(37)는 "북한은 아웅산 테러를 통해 미얀마의 주권과 자존심을 짓밟았다. 미얀마엔 이제 북한은 없고 남한 사람만 있다"고 말했다. 시내 쇼핑센터에선 한국산 제품이 고급 브랜드로 통한다. 미얀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운데 한국인(7백여명)이 일본을 제치고 수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북한과 미얀마는 지난해부터 슬금슬금 교류하는 눈치다. 한 소식통은 "지난해 말 서너 척의 북한 선박이 무기와 담배 등을 싣고 와 쌀로 바꾸어 갔다"고 말했다. '창광무역' 명함을 가진 북한인 10여명이 무역거래를 앞세워 미얀마를 드나들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양곤=이양수 특파원yas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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