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없는 삶 … 자살 급증

중앙일보

입력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투신자살이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최근 우리 옆에서 늘 벌어지는 일상사가 돼버린 자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 회장은 4일 오전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계동 현대 사옥에서 투신 자살했다.

최근 잇따른 자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자살은 더 이상 신문 지면에서나 볼 수 있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옆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상사가 돼버렸다.

◇ 사면초가 정 회장의 자살

정 회장의 자살 이유는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가 최근 대북송금특검과 대검의 잇단 수사와 재판으로 심한 심리적 압박을 받아왔다는 점과 유서 내용 등을 종합해볼 때 자살 동기를 추정할 수 있다.

정 회장은 부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특히 부친이 생애 말기에 온 힘을 쏟았던 금강산 관광 등 대북 사업을 이어 받았다.

정 회장은 자신이 사업을 이어받은 뒤 정치권의 각종 의혹 제기와 북측의 완고한 태도, 잇단 수사와 재판 등으로 사면초가의 상태에 있었다.

정 회장이 특히 유서에서 김윤규 사장과 부친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점이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달라'고 유언한 점으로 미뤄볼 때 부친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하루 평균 36명 자살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총 자살 건수는 모두 1만3천55건으로 전년 1만2천277건에 비해 6.3% 증가했다.

하루 평균 36명, 1시간에 1.5명 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98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로 1만2천458건에 이르렀던 자살 사건은 99년 1만1천713건으로 줄었다가 2000년(1만1천794건) 이후 계속 늘고 있다.

특히 경기 침체로 실업자, 신용불량자가 늘면서 생활고, 사업 실패에 따른 자살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생활고, 사업 실패에 따른 자살은 786건이었지만 ▲2001년 844건 ▲2002년 968건 등 해마다 큰 폭으로 늘었다.

성적 비관 등에 따른 10대 자살은 ▲2000년 466건 ▲2001년 333건 ▲2002년 273명으로 줄었지만, 경제 활동을 왕성하게 해야 하는 30대의 자살은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2000년 2천444건 ▲2001년 2천446건 ▲2천655건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정 회장과는 다소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최근 카드 빚에 시달리던 30대 주부가 자녀 3명을 아파트에서 떨어뜨린 후 자신도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3일 오후에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모 아파트에서 개인택시 기사 방모(45)씨가 지난달 24일 성적 부진으로 고민하다 목숨을 끊은 둘째 아들(16)의 죽음으로 고민하다 열흘 만에 아들이 자살한 같은 장소에서 목숨을 끊기도 했다.

◇ 자살 부르는 사회 분위기

전문가들은 개인의 삶을 자살로 이끄는 사회 분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김종호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자살은 희망이 없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이라며 "사회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로 잠재적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회 절망적인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정 회장처럼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자살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며 "자기 내부의 믿음이 깨졌다던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심한 자존심의 손상, 자기 뜻대로 안된다는 좌절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 하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김 전문의는 또 "고통이 있을 때 사회에서 대화를 나누며 풀 사람이 없다는 것도 자살이 증가하고 있는 한 원인"이라며 "미국에서는 경제공황이 왔을 때 책임을 지고 있는 은행 지점장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정회장의 죽음도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도 개인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모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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