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life] 무형문화재 나전칠기장 손대현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2면

나전칠기(螺鈿漆器)는 언제 보아도 기품 있는 사대부집 여인네다. 화려하되 야하지 않게 곱고, 단아하고, 정갈하다. 그래서 누구나 한번 그 멋에 빠져들면 헤어나기 힘들다. 그 멋이란 곧 그윽한 자연의 멋이다.

바탕을 이루는 '백골(나무로 만든 틀)'에다 옻칠하며, 무늬를 꾸미는 자개가 모두 자연이 아닌가. 문제는 이들 자연의 조각을 '작품'으로 교직(交織)해내는 장인의 솜씨. 산과 바다의 깊숙하면서도 영롱한 아름다움을, 인공이 아닌 듯 살려내려면 어차피 스스로 자연을 닮지 않으면 안되리라. 이를 증거하는 이가 바로 나전칠기 명장(名匠) 손대현(孫大鉉.54)씨다.

주름살 하나 없이 서글서글하니 잘 생긴 얼굴에 영락없이 아기 보살 같은 맑은 인상-. 마디지고 옻칠에 절어 시커메진 손을 보기 전엔 누가 그를 쉰 중턱이라고 볼 것이며, 평생을 쪼그리고 일해온 '쟁이'라고 하겠는가. 한마디로 그는 자연과 코드를 맞춰 살아온 사람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그를 만나면 그저 솔바람처럼 편안하다. 평소 차림도 수더분하고 경기도 광주의 산기슭에 자리한 공방이란 곳도 축사를 고쳐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그의 작품들도 그를 닮아 편안하다. 욕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손끝에서 숱한 명품들이 빚어지고 있으니…, 패러독스가 아닌가.

"세상 모든 것엔 자연으로부터 받은 결이란 게 있어요. 그 결을 따라 일을 하면 모든 게 자연스러워지고 그 결과물도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제가 하는 일이 한 작품에 수개월에서 많게는 일년여씩 걸리는 것도 자연의 본성대로 익도록 하기 때문이죠. 욕심을 내 지레 익히면 모양도 뒤틀리고 때깔도 절대 제 것이 안 나옵니다."

그는 현재 국가공인 명장(1991년 지정)이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4호 나전칠기장(99년 지정)이다. '무욕(無慾)의 욕심'으로 작품을 빚다보니 얻게 된 타이틀이지만 거기엔 40년이란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가 나전칠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도쿄올림픽이 열리던 64년 가을.

"전쟁통에 황해도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월남한 탓에 서울에서 근근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역 근처 조그만 무역회사에 사환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같은 건물 위층에 친구 아버지가 일하시던 나전칠기 공방이 있어 자주 드나들다보니 자개 빛깔이 얼마나 곱던지, 저걸 만들면 돈도 되겠다 싶어 몇날 며칠을 졸라 일을 배우게 됐죠."

바닥 일부터 시작해 이것 저것 익히길 5년. 하지만 아무리 해도 고수(高手)들의 솜씨는 흉내내기조차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스승 민종태(閔鍾泰.98년 84세로 작고)선생을 만난 건 그야말로 일생 일대의 행운이었다. 민선생은 국내 나전칠기의 중시조(中始祖)라 할 수 있는 전성규(全成圭)선생으로부터 수곡(壽谷)이란 호를 물려받은 제자. 선생을 성남의 공방으로 찾아가 처음 만난 건 69년 9월께. 결과는 "노"였다. 하지만 한술밥에 배부르랴 싶어 6개월 동안 허구한 날 얼굴을 들이댔다. 드디어 스승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미 20여명이 일하고 있었고 그 중엔 분야별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호랑이 사형들도 여럿 됐던 터라 처음부터 다시 죽어라 배웠다. 몇 개월 지나자 처음엔 시큰둥하던 스승도 눈길을 주기 시작하더니 이내 끼니를 챙겨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가 독립을 한 건 스승 품에 든 지 10년 만인 80년부터. 독립이라야 스승에게 준(準)완성품을 납품하는 수준이었다. 스승은 특별히 그에게 일본 수출용을 맡겼다. 하지만 틈틈이 자신만의 역량도 길러나갔다. 드디어 84년 동아공예전 입선을 시작으로 솜씨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승공예대전에서만 여덟차례에 걸쳐 각종 상(93년 18회 때 '日月五嶽圖文匣'으로 국무총리상)을 받을 정도의 공력을 쌓았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가진 굵직굵직한 초대전만 중국.일본.미국.독일.포르투갈.이탈리아.프랑스.몽골 등에서 모두 10여 차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 영구소장된 '모란당초능화형쟁반'도 그의 작품이고,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방문 때 정상들에게 선물한 '나비당초문서류함'(7점)과 김대중 대통령이 일왕에게 선물한 '쌍휘문보석함', 방한했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선물한 '십장생도보석함'도 모두 그의 솜씨다.

"아직 멀었어요. 감각이나 솜씨, 모든 면에서 스승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요."

전칠기를 만드는 데 거쳐야 하는 공정은 줄잡아 20여 단계. 단계마다 수십 번 손질을 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높이 1백68㎝.길이 78㎝ 크기의 관복장 하나에 6개월, 앉은뱅이 차상(茶床)을 만드는 데도 2개월이 소요된다. 그러니 완성품의 화려함만을 눈속임으로 내세워 어느 한 구석 소홀히 했다간 작품을 그르치게 마련. 실제 70, 80년대에 많은 사람이 돈벌이에 급급해 대충대충 하는 바람에 나전칠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조급증에 손이 곱은 사람은 일찍 손을 떼라"고 주문한다. 이같은 정성 외에 그의 작품이 '명품'인 또 다른 이유는 솜씨도 그렇거니와 재료도 최상급으로 쓰기 때문. 옻칠은 원주산 성칠(盛漆.초복 지나 처서 사이에 채취한 칠)을, 자개도 남해산 전복이나 소라의 '청년패(靑年貝)'를 주로 쓴다. 그는 "고려 때 명품들을 보라"며 "제대로 된 작품은 능히 천년도 간다"고 장담한다. 그는 스승이 작고하기 6개월 전 '수곡'이란 호를 물려받았다. 28년 만의 인정이었다. 그리고 요즘 어디를 가나 '선생님' 소리를 듣는다. 이미 공주전문대(3년).청주대(2년).배재대(2년) 등 대학 강단에도 선 경험이 있다. 하지만 아직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있다. 좀더 분발해 나전칠기의 전성기인 고려 때 수준과 영광을 재현하는 일(그는 95년 일본 중요문화재인 고려시대 '나전대모국당초문염주합'을 고스란히 복제, 주위를 놀래기도 했다)과 그에 걸맞은 제자를 키우는 일, 나전과 칠을 순수 미술장르와 접목시켜 세계화하는 일, 그리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정리해 개인박물관을 꾸미는 일 등이 그것이다. 과연 이건 욕심인가, 아닌가.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권혁재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