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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지자체장은 빼고 경영자만 처벌?…꼬이는 중대재해법

중앙일보

입력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관계자들이 지난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인근에서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용균이가 엄마에게 가는 길” 4일차인 비정규직 이제그만은 지난 10일부터 ‘더이상 일하다 죽지않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오체투지 행진에 나섰다. 뉴스1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관계자들이 지난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인근에서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용균이가 엄마에게 가는 길” 4일차인 비정규직 이제그만은 지난 10일부터 ‘더이상 일하다 죽지않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오체투지 행진에 나섰다. 뉴스1

처벌 대상서 행정부·공공기관 장(長)은 제외

고용노동부 등 정부가 지난 28일 국회에 제출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수정안이 논란의 불씨를 더욱 키우고 있다. 기업에 대해서는 최고경영자(CEO)ㆍ오너까지 관리 책임을 물으면서, 장관ㆍ지자체장은 처벌 대상에서 슬그머니 뺐다.

29일 정부ㆍ재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수정안에서 산재 발생의 인과관계를 추정해 경영자를 처벌하는 조항을 삭제했다. 법무부가 인과관계 추정만으로 형사처벌까지 하는 것은 “형사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할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기 때문이다.

정부는 또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 한도를 기존 ‘5배 이상’에서 ‘5배 이하’로 고쳤다. 법 적용 유예 대상 사업장도 50인 미만 사업장(4년)에서 50~100인 미만 사업장(2년)을 추가했다. 법 적용에 따른 경제적 파장을 줄이기 위한 조치다. 또 50~100인 미만 사업장은 법 적용을 2년 유예하기로 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원안과 정부 수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원안과 정부 수정안.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경영자 책임은 사실상 그대로 유지  

하지만 뜯어보면 기업 오너와 CEO에 대한 처벌 조항은 사실상 그대로 유지했다. 재계에서 반발했던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최소 2년 이상 징역형을 부과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조항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 정부 책임은 확 줄었다. 정부는 중대재해 발생 시 책임을 묻는 경영책임자의 범위에서 중앙행정부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장(長)을 제외했다. 공무원 책임에 대해서도 면책범위를 넓혔다. 원안은 ‘결재권자인 공무원’을 처벌 대상으로 정했지만, 정부 안은 ‘법령에 따른 인ㆍ허가권 또는 감독권을 가진 공무원이 형법상 직무유기죄를 범했을 경우’로 처벌 대상을 축소했다.

그래서 법안 명칭도 기존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법안’에서 ‘정부 책임자’를 빼고 ‘중대재해 기업 및 경영책임자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다. 재계의 우려가 여전한 상황에서 정부만 규제에서 쏙 빠져나가는 ‘꼼수’를 쓴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10대 그룹 부사장은 “위헌 시비가 거론된 조항만 미세 조정했을 뿐 기업들이 우려하는 과도한 처벌 조항은 실제적으로 바뀐 게 없다”며 “결국 이 정부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가 기업인 것이 또다시 증명된 셈”이라고 비판했다.

양경수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 당선자가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즉각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시작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은 오는 30일부터 민주노총 조합원과 민주공동행동,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1만명이 하루간 동조단식에 들어선다고 밝혔다. 뉴스1

양경수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 당선자가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즉각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시작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은 오는 30일부터 민주노총 조합원과 민주공동행동,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1만명이 하루간 동조단식에 들어선다고 밝혔다. 뉴스1

노동계가 이 법안을 강조하는 이유?  

반면 법안의 원안 통과에 공을 들이는 정의당과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법안이 누더기가 됐다”며 다른 쪽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이 같은 논란이 불거진 근본적인 원인은 재해 발생에 대한 직접적 책임이 없더라도 ‘윗선’과 관련자를 형사처벌하면 산재를 줄일 수 있느냐에 대한 시각차에서 발생한다.

정의당과 민주노총 등은 책임자 처벌 강화는 기업이 필수 안전ㆍ보건 조치 의무 이행의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 이 법안이 산재 발생 사업장의 경영자를 무조건 처벌하자는 법이 아니라는 논리도 편다. 사고 발생 5년 전부터 안전ㆍ보건조치 의무 위반 사실이 수사기관 등에 의해 3회 이상 확인됐을 때나, 사업주가 사건 은폐를 지시하는 등 산재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을 때 경영자 책임을 묻도록 설계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환경범죄 등의 단속 및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에도 인과관계를 추정해 처벌하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비슷한 논리로 사업주를 처벌하는 이번 법안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민노총은 산재 사고 대부분이 종업원 50인 미만인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들 사업장에도 즉각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협의회 참석을 마치고 국회 본관 앞에서 '중대재해 기업 처벌법' 재정을 위해 단식 투쟁중인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와 故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 故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씨,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이상진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인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협의회 참석을 마치고 국회 본관 앞에서 '중대재해 기업 처벌법' 재정을 위해 단식 투쟁중인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와 故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 故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씨,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운동본부 집행위원장 이상진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인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재계에서도 일하다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재계는 실무자 부주의, 설비 고장 등 경영 활동과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는 재해까지 기업주에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게 정당하냐고 항변한다.

이근우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최근 ‘산재예방 선진화를 위한 입법과제’ 토론회에서 “법률 제정 목적이 정당하다는 것만으로 그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다”며 “중대재해, 경영책임자 등의 개념이 광범위하고 위험방지 의무 범위도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국회ㆍ정부가 ‘처벌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형사처벌에 의존한 문제 해결 방식은 검찰 권력을 되레 키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질적으로 산재가 줄어들 수 있도록 안전ㆍ보건 의무 위반 현장에 대한 적발을 강화하고, 위반 행위가 즉각 시정될 수 있는 섬세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산업 현장에서 산재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위험한 작업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불공정 거래의 문제가 있다”며 “이 같은 거래 관행을 막는데 집중하지 않고, 기업주ㆍ공직자 처벌 강화 조치 위주로 접근하는 것은 원시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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