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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욕, 저래도 욕"...낙태죄 폐지 D-7, 거여의 눈치작전

중앙일보

입력

모두의 페미니즘 소속 '낙태죄는 역사속으로 TF팀'이 지난달 15일 서울 서대문구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신촌점 앞 광장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 집회'를 마치고 행진하고 있다. 뉴스1

모두의 페미니즘 소속 '낙태죄는 역사속으로 TF팀'이 지난달 15일 서울 서대문구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신촌점 앞 광장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 집회'를 마치고 행진하고 있다. 뉴스1

1주일 뒤인 31일 자정이 지나면 낙태죄의 효력이 상실된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 일부)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서다. 당시 헌재는 “위 조항들은 2020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고 했다. 이에 따라 내년부턴 임신중절이 처벌되지 않는다. 처벌 여부만 놓고 보면 낙태죄가 완전 폐지되는 것이다.

법안 6건 발의, 논의는 1번

자유연대 등 단체 회원들은 지난달 1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집회 현장 맞은 편에서 '낙태죄 유지'를 촉구하며 맞불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자유연대 등 단체 회원들은 지난달 1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집회 현장 맞은 편에서 '낙태죄 유지'를 촉구하며 맞불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국회는 의도했든 아니든 법 개정 시한을 놓치게 됐다. 법안이 없는 건 아니다. 낙태죄는 유지하되 임신 초기 14주까지는 무조건 처벌하지 않도록 한 정부 법안이 지난 10월 입법예고 됐다. 여야 의원들이 각각 발의한 법안 5건도 제출된 상태다. 지난 8일엔 국회 법사위에서 공청회도 열렸다.

문제는 각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점이다. 입법예고 직후 여성계는 정부 안에 대해 “결국 낙태죄가 존속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며 전면 폐지를 요구했다. 반면 종교계는 “정부 안은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 의견도 엇갈렸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조건 없는 낙태 허용 시기를 10주 미만으로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낙태를 비범죄화하는 방향으로 재검토하라”는 의견을 냈다.

당론 못 정한 민주당…전략적 회피?

사회 각계에서 벌어진 논쟁은 174석 거대 여당 내부로 옮겨붙었다. 여성단체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부 법안은 낙태죄 존치법”이란 비판이 제기됐고, 권인숙 의원은 낙태죄 완전 폐지 법안을 냈다. 박주민 의원은 임신 24주 안이면 조건 없이 낙태를 허용하는 일종의 절충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민주당 내부에도 낙태죄 존치 의견이 적지 않았다.“종교계가 저렇게 반대하는데 왜 굳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낙태 허용 범위를 넓혀 욕을 먹느냐”(한 중진의원)는 논리다. 지난달 말 민주당 핵심관계자는 “낙태죄는 이래도 저래도 욕먹는 사안”이라며 “당론을 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민주당 일각에선 “차라리 연말을 넘겨 낙태죄 효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법 개정을 논의하자”(수도권 재선 의원)는 주장도 나왔다. 마침 지난 8일 공수처법 강행 처리 과정에서 소관 상임위인 국회 법사위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법사위에 앞으로 야당은 없다”며 퇴장했고, 간사였던 김도읍 의원은 상임위 변경을 신청했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법사위의 한 보좌진은 “야당이 법사위를 파행으로 이끌면서 낙태죄 연내 개정 무산에 대한 책임도 분산됐다. 우리에겐 출구가 열린 셈”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23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리를 위한 법안소위 개최를 요구했지만, 낙태죄는 안건에 포함하지 않았다.

의료 현장 ‘혼란’ 우려도

문제는 형법상 낙태죄만 없어질 경우 의료 현장에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강간 등에 의한 임신 ▶혈족·인척 간 임신 등에 한해 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있다. 그 외의 경우는 낙태죄가 효력을 상실해도 합법적인 임신중절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럽 등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 국가에서 쓰이는 ‘미프진’ 등 먹는 낙태약도 우리나라엔 도입되지 않았다. 여성의 건강을 해치는 불법 임신중절 시술이 늘어날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이에 대해 박혜인 전국여성연대 활동가는 “국회의 의지가 없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여성들이 낙태를 안전하게 할 수 있으려면 낙태죄 효력이 없어지는 걸 기다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미프진 도입 등 후속 대책 마련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오현석 기자, 김수현 인턴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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