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체아 대부 문정현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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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사랑해요. 감기 들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8일 아침 전북 익산시 월성동 ‘작은 자매의 집’. 문하늘(12)양은 ‘흰 수염이 성성한 신부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어리광을 부렸다.
이날 장애아들이 차례로 전해주는 꽃과 카드를 받아들고 “가장 값진 선물”이라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이는 문정현(63)신부.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41명 정신지체아들의 아버지다.

文신부는 올해로 18년째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오갈 곳 없는 장애아들을 거둬 학교를 보내고 치료도 하는 등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쏟고 있다.

그가 장애아들의 아버지로 나서게 된 것은 1986년.

“장수군에 있는 장계성당의 신부로 있을 때 농촌마을에 갔을 때입니다. 예닐곱살쯤 돼 보이는 정신박약아가 아무도 없는 집 마당 감나무에 묶여 있는 걸 보았어요.

그 옆에는 밥을 담은 양푼 그릇이 뒤집어져 있고 얼굴은 음식으로 범벅이 돼 있었지요. 눈물이 왈칵 솟았어요. 이런 아이를 외면하고 사회운동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성당 옆 창고를 치우고 아이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다.

소문이 나면서 정신지체아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재의 작은 자매의 집은 건물이 4채이며, 장애아를 돌보는 직원이 20명을 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사실 文신부는 통일·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온 ‘거리의 신부’로 더 알려져 있다. 반미시위의 현장에는 거의 빠짐 없이 나타나 흰수염을 날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한다. 힘이 부치면 대(大)자로 누워 엉엉 울어버리기도 한다.

그가 나타나면 특히 전경대원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긴장한다. 툭 하면 전경들의 헬멧·곤봉 등을 빼앗아 버리는 ‘깡패신부’로 이름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74년 인혁당 사건 구속자 구명운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고, 각종 노동·농민운동의 중심에 서 왔다. 88년부터는 고교 교사시절 제자였던 서울대생 조성만씨의 죽음을 계기로 임수경씨와 함께 방북하는 등 통일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매주 수요일 오후 군산 미군부대 앞에서 벌이는 ‘소파 개정’시위는 5년째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벌써 2백80회를 넘어섰다.

최근에는 동생인 문규현 신부 등이 새만금 개발 반대를 외치며 펼치고 있는 부안∼서울 ‘삼보일배(三步一拜) 운동’을 따라가며 비디오테이프로 찍어 ‘참소리’라는 인터넷신문에 올리고 있다.

文신부는 이러한 바깥 활동에 참석하더라도 경찰에 연행되는 등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막차를 타고서라도 반드시 자매의 집으로 돌아온다.
“어디에 있든 아이들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시위에 참가하다 보면 녹초가 되기 쉽상이지만 아이들이 등에 올라타고 장난치는 걸 받아주면 피로가 싹 가셔요.”

文신부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나 통일운동이 모두 ‘생명체에 대한 애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노동운동하다 쫓기는 사람이나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 모두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형제자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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