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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우울증, 아들은 실어증···호주 코로나 이산가족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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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2차 유행에 홍역을 치르던 호주는 강력한 봉쇄로 확산세를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큰 후유증도 남았다. 해외 체류하는 호주인들이 겪은 고통이다.

1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은 코로나19 사태로 9개월간 떨어져 지내야 했던 한 호주 가족의 사연을 전했다. 이 가족은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아빠는 우울증에, 둘째 아들은 실어증에 걸렸다.

지난 8일 호주 퍼스 공항에서 코로나19로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가족들이 재회하고 있다. 호주는 8월부터 빅토리아 주와 뉴사우스웨일스 등 각주 간 이동을 금지했다가 11월 말부터 해제했다. [EPA=연합뉴스]

지난 8일 호주 퍼스 공항에서 코로나19로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가족들이 재회하고 있다. 호주는 8월부터 빅토리아 주와 뉴사우스웨일스 등 각주 간 이동을 금지했다가 11월 말부터 해제했다. [EPA=연합뉴스]

호주 시드니에 사는 네 살짜리 소년 유브라즈 크리슈나는 지난 3월 엄마, 형과 함께 인도에 있는 외가를 방문했다.

한 달 뒤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됐다. 호주와 인도가 각각 국경을 폐쇄하면서 크리슈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갈 길도 막혔다. 이후 크리슈나의 아빠는 호주에서 홀로 외로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문제는 크리슈나의 자폐 증세였다. 크리슈나는 여행 전까지 꾸준히 치료를 받아 상태가 호전되던 중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와 오랜 타지 생활이 증상을 다시 악화시켰다. 특히 강한 유대감으로 아이를 안정시켰던 아빠의 부재가 준 충격이 컸다. 크리슈나는 점점 기력을 잃었고 끝내 말문까지 닫았다.

지난 11월 인도 뭄바이에서 주민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1월 인도 뭄바이에서 주민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호주에 남은 아빠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가족 걱정에 쌓인 스트레스에 우울증이 찾아왔고, 고혈압약도 먹기 시작했다. 크리슈나의 형도 9개월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는 등 온 가족의 일상이 무너졌다.

엄마 싱은 백방으로 귀국할 방법을 찾아 나섰지만, 양국을 오가는 항공편을 구하기가 어려운 데다, 비용도 훌쩍 뛰어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호주 정부가 마련한 귀국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지난 10월 19일에는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해외 체류 호주인의 귀국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호주 국적기 콴타스. 호주 연방 정부는 전세기를 통해 10월 중순부터 코로나19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호주인들을 데려오는 '귀국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호주 국적기 콴타스. 호주 연방 정부는 전세기를 통해 10월 중순부터 코로나19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호주인들을 데려오는 '귀국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당시 모리슨 총리는 전세기를 띄워 영국·인도·남아공에 체류 중인 호주인을 데려오겠다고 밝혔다. 귀국을 희망한 호주인은 모두 2만 6700여명으로 추산됐다. 치료가 시급한 크리슈나의 상황에 비춰볼 때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싱은 최근 호주 정부가 공개한 크리스마스 전 귀국 지원 명단에서 제외된 것을 확인했다. 정확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싱은 가디언에 “나는 단지 가족의 건강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다시 고려해 달라”고 호소했다.

“2차 확산에 발목 잡힌 귀국 지원…성공인가, 실패인가” 

호주 현지 언론에 따르면 해외 체류 중인 호주인 상당수가 크리슈나 가족처럼 기약 없는 귀국 계획에 지쳐가고 있다. 이들은 모리슨 총리가 10월에 약속한 귀국 지원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지난 10일 해외 체류중인 호주인의 귀국을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비판에 "귀국 지원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작동 중"이라고 반박했다. [EPA=연합뉴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지난 10일 해외 체류중인 호주인의 귀국을 제대로 돕지 않았다는 비판에 "귀국 지원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작동 중"이라고 반박했다. [EPA=연합뉴스]

결국 모리슨 총리는 지난 10일 라디오 방송 2GB에 출연해 해명에 나섰다. 그는 "귀국 지원 프로그램이 잘 작동하고 있으며 성공적"이라면서 "다만 귀국 지원 신청자의 증가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이후 최근까지 귀국 지원 프로그램으로 입국한 호주인은 3만2000명으로, 처음 등록됐던 2만6700명보다 6000명가량 늘었다. 그리고 아직 귀국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3만9000명이 남아 있다.

지난 8월 호주 멜버른 중심가 버크 거리. 코로나19 급증으로 외출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거리가 텅 비어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8월 호주 멜버른 중심가 버크 거리. 코로나19 급증으로 외출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거리가 텅 비어있다. [EPA=연합뉴스]

현지 언론들은 지난 7월부터 시작된 2차 확산이 발목을 잡았다고 전했다. 상반기 정부 계획대로라면 이미 7만 명의 호주인이 고국 땅을 밟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 7월 이후 빅토리아주를 거점으로 폭발한 2차 확산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빅토리아주에선 지난 8월 하루 7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강력한 봉쇄에 들어갔고, 해외 입국자도 일주일에 7000명으로 제한했다.

격리 시설 부족도 문제였다. 연방 정부는 각 주 호텔과 공공시설 등을 해외 입국자 격리 시설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주 정부가 미적거렸다. 해당 주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주 정부들이 경계를 풀고 격리 시설 지원에 나선 건 확진자가 한 달간 나오지 않은 11월 이후부터였다.

현지 매체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강력한 봉쇄 정책으로 추가 확산은 잡았지만, 그 과정에서 해외 호주인들이 희생됐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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