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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내가 정치적으로 결정” 노무현은 호남고속철 책임 떠안았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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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강갑생 기자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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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호남고속철도 논란이 한창이던 2006년 1월 2일 전남 함평의 폭설 피해 지역을 찾아 농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호남고속철도 논란이 한창이던 2006년 1월 2일 전남 함평의 폭설 피해 지역을 찾아 농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6년 11월 29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목포를 찾았다. 서남권 종합발전 구상을 위한 현장점검 목적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지역유지 등 참석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해찬 전 총리가 곧이곧대로인 사람이라 호남고속철도는 타당성이 없다고 말해 난리가 났었다. 그래서 (내가)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했다.”

호남고속철도 건설 둘러싼 진통 #노 전 대통령, 전면에 나서 해결 #신공항 논란, 문 대통령은 침묵 #“명확한 입장 밝히고 책임도 져야”

발언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우선 2005년 1월 14일을 되짚어 봐야 한다. 광주광역시를 찾아 광주·전남지역 인사들을 만난 이해찬 총리는 호남고속철도를 조기 완공해달라는 건의를 받았다. “잘 검토하겠다”며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 총리는 달랐다. 그는 “(2004년 개통한) 경부고속철도 사업은 대표적인 정책실패 사례로 수요가 당초 예상의 30%에 그쳐 매년 수천억 원씩 적자가 나게 생겼다”며 “호남고속철도 사업 역시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고 결정할 문제”라고 답했다.

이 총리는 또 “국무조정실에 경부고속철 사업을 대표적인 정책실패 사례로 연구분석토록 지시했다”며 “호남고속철도도 15조원 정도 들여서 하게 되면 역시 수천억 원씩 적자가 날 게 빤한데 섣불리 할 수 있겠느냐”고도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이 전해지면서 호남지역이 불같이 반발했다.

영남권 신공항 후보지의 평가점수와 투자비.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영남권 신공항 후보지의 평가점수와 투자비.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러자 노 대통령이 직접 호남 달래기에 나섰다. 그해 11월 전남도 신청사 개청식에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호남고속철도 건설은 인구나 경제성 같은 기존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존 잣대로 평가하면) 안되는 지역은 항상 안될 수밖에 없다”며 “미래에 비전이 있는가, 국가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인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과 언론에선 대통령이 호남고속철도 추진 의지를 표명한 거란 해석이 나왔다.

40여일 뒤 ‘호남고속철도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에선 경제성평가(비용 대비 편익, B/C) 결과가 발표됐다. 호남고속철도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전까지 경제성평가를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국토연구원이 실시한 평가결과는 0.31에 불과했다. 통상 1.0을 넘어야 사업성이 있다고 보는 걸 고려하면 사업추진은 말도 꺼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은 상당했다. 예산 낭비, 지방선거용 매표 행위 같은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듬해 8월 정부는 총 10조 5000억원이 투입되는 호남고속철도(오송~광주) 건설방안을 확정했다. 그리고 계획보다 2년 당겨진 2015년 개통식을 가졌다. 수요 부족 등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지역 균형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호평도 나온다. 해당 사업을 담당했던 전직 국토교통부 관료는 “숱한 난관 속에서도 호남고속철도 사업이 이뤄질 수 있었던 건 노 전 대통령이 책임을 온전히 다 떠안았기 때문”이라고 기억했다. 노 전 대통령이 “정치적 결정”임을 공개하며, 사실상 전면에 나서준 덕분이라는 의미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2016년 6월 9일 부산 가덕도에서 가덕신공항 유치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2016년 6월 9일 부산 가덕도에서 가덕신공항 유치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15년이 흐른 지금 대형 국책사업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영남권 신공항 얘기다. 지난달 17일 총리실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가 사실상 백지화로 해석될 수 있는 ‘근본적인 검토 필요’ 결론을 밝히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김해신공항 사업에 반대해온 부산·울산·경남(부·울·경) 지역에선 사실상 김해신공항 백지화로 해석하며 부산 가덕도를 신공항 입지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한 발 더 나가 가덕도를 신공항 부지로 정하고, 예타도 면제해주는 내용의 특별법을 연내 통과를 목표로 발의했다. 반면 대구·경북 지역에선 이에 대한 반발 기류가 거세다.

이런 와중에 공항사업을 책임진 국토부 관계자들은 “검증위 결과 수용, 후속계획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얼마 전 국회에 출석한 김현미 국토부장관도 “검증위 결과는 유감스럽다”면서도 “김해신공항 백지화는 아직 아니다. 검토가 필요하다”는 애매한 답변을 내놨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는 대신 국회에서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이 통과되기만 기다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가뜩이나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후속계획을 서둘러 확정하기보다는 특별법이 통과된 뒤 “국회의 뜻을 존중한다”며 슬그머니 가덕도로 방향을 틀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만일 이런 관측대로 된다면 정치권이 대형 국책사업을 정략적 필요에 따라 예타면제 조항을 넣은 특별법으로 좌지우지하는 나쁜 선례가 만들어지게 된다. 익명을 요구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가덕도 특별법이 통과된다면 앞으로 철도나 공항 지어달라는 특별법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영남권 신공항을 에워싼 논란의 의미가 간단치 않은 이유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정 최고 책임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문 대통령은 4년 전인 2016년 6월 부산을 찾아 ‘시민과 더불어 가덕신공항 유치’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현재도 같은 판단이라면 국민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김해신공항 백지화, 가덕도신공항 추진”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뒤따르는 책임도 물론 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그 역시 분명히 표명해야 한다. 국책사업의 근간이 흔들릴 위기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문득 노 전 대통령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싶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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