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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의 고심, 그 앞에 놓인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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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선욱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선욱 산업1팀 기자

최선욱 산업1팀 기자

국내 최대 규모 기업인 모임 대한상공회의소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자리 수락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최 회장은 내년 3월 임기가 끝나는 박용만 현 대한상의 회장의 후임으로 거론된다. 사실상 추대 형식으로 회장을 선출해온 게 관행이어서, 최 회장 본인 결정만 남았다고 보는 게 대한상의 안팎의 시각이다.

최 회장이 차기 유력 인사로 거론되는 이유는 SK가 재계 서열 3위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4대 그룹이 주도하며 경영계 목소리를 내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들의 탈퇴로 위상이 약해진 상태다. 이에 정부·여당의 ‘기업규제 3법’ 추진 움직임을 막아내기 위한 강력한 구심점이 다시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삼성·현대차·LG 그룹 총수에 비해 회사·개인 관련 시급 현안이 덜하다는 점도 반영됐다.

대한상의 회원사는 18만곳 정도다. 최 회장이 추대되면 그가 강조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요소를 경영 핵심 기조로 삼는 것) 경영 철학이 확대돼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이란 예측도 경영계 일부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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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원사 중 98%에 이르는 중견·중소기업의 이익을 함께 대변해야 하는 건 회장의 책무다. 이들 회사에 ESG 경영이란 말은 국내 최상위 기업의 여유 정도로 취급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결국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캐디·택배기사 등) 고용보험 의무 적용,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용자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처벌법 반대 등에도 회장이 목소리를 내야 할 수밖에 없다. 최 회장도 이 점을 알고 있다고 한다.

대한상의가 경영자 공동이익을 꾀하고 그 의견을 종합해 정부에 건의하는 건 법에 적힌 역할이다. 법대로 할 수만 있다면 ESG 경영은 SK에서 주도하고, 대한상의 회장으로선 회원사 이익을 대변하면 된다.

문제는 그 목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느냐는 점에 대해 최 회장을 포함한 경영계가 동의하냐는 데 있다.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정부·여당은 ‘적폐청산’ 구호를 내세워 여전히 기업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최 회장의 선친인 고(故) 최종현 회장이 전경련 회장 시절 김영삼(YS) 정부에 금리인하·규제해소 등을 주장한 뒤, 세무조사를 받은 기억이 경영계엔 아직 남아있다.

최 회장이 다른 이유로 대한상의 차기 회장직을 고사할 순 있다. 다만 정치 권력에 밉보일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피하게 된다면 그건 불행이다.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경영계의 이런 걱정을 덜어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최선욱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