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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안 비틀고 문화재 축적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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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

코로나19가 주춤해지면 내년 1월31일까지 계속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세한·평안’전에 가보시길. 길이 14m가 넘는 국보180호 세한도 두루마리가 ‘완전체’로 펼쳐진 모습이 장관이다. 실업가 출신 손창근(91) 선생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작품을 올 초 국가에 기증한 걸 계기로 열리고 있다. 이를 포함해 문화재 203건 305점을 국민 공동 소유로 내놓은 선생에겐 오는 8일 문화유산보호서훈(문화훈장)이 수여된다. 참고로 문화훈장이 별도 분류된 2004년 이래 5개 등급 중 최고 높은 금관훈장은 여태 없고, 은관은 10여 차례 수여된 바 있다.

올해 이와 명암이 엇갈린 문화재 소식도 있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3대째 물려오던 보물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은 일이다. 국가지정문화재에 관한 상속세는 면제되지만 가업을 잇는 과정에서 가중된 재정난을 불상 판매 대금으로 해결하려 한 고육책이었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이 구매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더 나은 해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지폈다.

노트북을 열며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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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사례를 전화위복 삼아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고 계속 보존할 수 있는 효과적 방안을 논할 때가 됐다.” 지난 1일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열린 ‘상속세의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도 도입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에서 한국박물관협회 윤열수 회장이 한 말이다. 지난달 25일 이광재(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부동산·유가증권 외에 ‘서화·골동품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미술품’도 상속·증여세 물납대상에 포함시키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것도 이같은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실은 10여 년 전부터 이런 요구는 있었다. 하지만 “상속세 낼 정도면 부자인데, 결국 부자 특혜 아니냐”는 비판에 막혀 주춤했다. 물납 대상 범위를 어떻게 할지, 심의는 누가 할지 같은 세부절차부터 현금납부자와의 형평성, 국가재정건전성 우려까지 논의할 게 태산이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일 아니다. 정준모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는 “언제까지 기업 손목 비틀면서 문화 공헌 짜낼 거냐.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인데 부자들이 기분 좋게 기부·납세하는 나라 좀 만들자”고 토로했다.

문화재는 공동체를 묶어주는 공통의 유산이자 문화·관광자산 역할도 한다. 문화재·미술품 대납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영국의 경우 비틀스 멤버 존 레논의 편지와 작사 노트 등 대중문화 유산까지 세금 대신 받고 있다. 수집가의 선의와 희생에 기대야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가 더는 아니다. 미래 문화 자산에 투자한다는 자세로 견실한 국회 논의를 기대한다.

강혜란 문화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