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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원조··· 순흥 청다리 또다른 슬픈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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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청다리.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잇는 이 다리에서 '다리에서 주워온 아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불행히도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이 다리는 2004년 새로 지은 것이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청다리.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잇는 이 다리에서 '다리에서 주워온 아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불행히도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이 다리는 2004년 새로 지은 것이다.

“엄마 난 어디서 태어났어?”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어렸을 적 엄마의 농담에 안 울어본 아이가 없었을 테다. 왜 세상의 엄마는 하나같이 제 아이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며 놀렸을까. 그 문화적 원형 나아가 역사적 맥락은 무엇일까. 있기는 할까.

놀랍게도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그 현장이 있다. 아기를 주워 와 키운 다리.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를 흐르는데, 이 사이에 놓인 청다리가 바로 전설의 진원지다. 순흥에는 실제로 청다리 밑에서 아이를 주워 와 키웠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순흥 청다리가 팔도의 온갖 다리로 확산했다는 얘기인데, 여행작가 이종원(54)씨는 순흥 청다리를 “전 국민의 심정적 고향”이라고 농 삼아 이른다.

단종 애사 외전  

금성대군 신단. 순흥에서는 여전히 이 신단에서 제사를 지낸다. 봄 가을에 한 번씩 1년에 두 차례 지낸다.

금성대군 신단. 순흥에서는 여전히 이 신단에서 제사를 지낸다. 봄 가을에 한 번씩 1년에 두 차례 지낸다.

오늘날에는 짓궂은 농담거리로 쓰이지만, 청다리의 기원은 참혹한 역사를 담고 있다. 수양대군(1417~68)이 단종(1441~68)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1426~57)이 소백산 남쪽 자락 순흥으로 유배를 온다. 금성대군은 유배지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죽임을 당한다.

모의에 가담한 사람만 죽은 게 아니었다. 애먼 순흥 사람 수백 명이 청다리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순흥 30리 안에는 사람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청다리 아래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 밖 마을까지 흘렀다고 한다. 피가 비로소 멈춘 마을, 안정면 동촌 1리는 아직도 ‘피끝마을’이라고 불린다. 1457년의 참상을 역사는 정축지변(세조 3년)이라 이른다. 영주시가 그 뒷이야기를 기록했다.

영주 소수박물관에 있는 제월교비. 퇴계 이황이 다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영주 소수박물관에 있는 제월교비. 퇴계 이황이 다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수백 명의 선비와 가족이 모두 희생되었다. 그때 살아남게 된 어린아이 몇을 관군이 서울로 데려다 키운 데서 자연스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생겼다. 어두운 그늘에서 명예회복 받게 되길 바라는 의미로 다리 비명은 ’제월교(霽月橋)‘라 부르게 됐다(영주시, ‘선비의 고장 영주’ 53쪽).’

제월교는 ‘제월광풍(霽月光風)’에서 비롯된 말이다. ‘장맛비가 멎은 뒤 맑은 하늘 같은 기운’이라는 뜻으로 훗날 명예를 되찾는다는 의미가 더해진다. 풍기 군수로 부임했던 퇴계 이황(1501~70)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 다리 옆에 서 있는 비는 재현품이고, 숙종 36년(1710) 다시 세운 비가 영주 소수박물관에 있다.

되살아난 은행나무

압각수. 1200년 묵은 은행나무다. 이 고목에도 정축지변의 아픈 역사가 배어있다.

압각수. 1200년 묵은 은행나무다. 이 고목에도 정축지변의 아픈 역사가 배어있다.

정축지변이 순흥 땅에 남긴 상처는 깊었다. 세조는 수많은 순흥 사람을 죽였고, 순흥을 폐부(廢府)하고 현(縣)으로 강등시켰다. 이후 긴 세월 순흥은 잊힌 땅이 되었다. 순흥 사람이 외려 역사의 참상을 되새긴다. 금성대군 신단(사적 491호)에서 여전히 제사를 올린다. 신단 근처 은행나무도 그날을 증언한다. 권화자(60) 영주시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옮긴다.

압각수 은행나무 잎. 땅 바닥을 노랗게 물들였다. 오리발처럼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압각수 은행나무 잎. 땅 바닥을 노랗게 물들였다. 오리발처럼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잎이 오리발처럼 생겨 압각수(鴨脚樹)라 부르는 은행나무다. 어릴 적부터 ‘순흥이 죽으면 이 나무도 죽고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난다’는 말을 들었다. 정축지변 당시 나무도 불에 타 죽어 버렸는데, 1682년 순흥부가 다시 설치되자 잎이 돋아났다고 한다. 1200년 묵은 은행나무치고는 키가 작은 편인데 한 번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이다.”

순흥 읍내에 있는 '순흥 전통 묵집'의 묵밥. 구순의 할머니가 묵을 쒀 묵밥을 만든다.

순흥 읍내에 있는 '순흥 전통 묵집'의 묵밥. 구순의 할머니가 묵을 쒀 묵밥을 만든다.

순흥의 향토 음식 메밀묵도 그날의 역사에서 비롯된다는 설이 유력하다. 갑자기 수많은 남자가 죽는 바람에 순흥에 농사지을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메밀을 키웠던 게 순흥 메밀묵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순흥 청다리에 관한 다른 야사도 내려온다. 소수서원에서 기숙하던 유생들이 청다리 건너 저잣거리에서 기녀들과 놀다 아기가 생겼고, 그 아기를 청다리 밑에 버렸는데 마을에서 아기를 주워 키웠다는 줄거리다. 영주문화연구회 배용호(69) 이사는 “유림을 비하하려는 일제의 거짓말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고 설명했다. 소수서원은 1543년 풍기 군수 신재 주세붕(1495~1554)이 세웠다. 정축지변이 일어나고 86년 뒤 일이다.

영주=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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