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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21세기 한국 과학기술계가 최형섭을 그리워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본관에 있는 최형섭 KIST 초대 소장의 흉상. 사진 최준호 기자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본관에 있는 최형섭 KIST 초대 소장의 흉상. 사진 최준호 기자

짙은 구릿빛 청동 흉상이 조명을 받아 반짝인다.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 걸까. 시선이 수평에서 15도쯤 위를 향한다.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본관 1층 대강당 ‘존슨홀’을 마주보고 서 있는 이 흉상의 주인공은 송곡(松谷) 최형섭(1920~2004) 박사다.  과학기술 분야 국내 최초의 정부 출연연구소인 KIST의 초대(1966~1971) 소장과 이후 과학기술처 2대 장관(1971~1978)을 역임한 인물이다.

국내 25개 정부 출연연구원 중 소(원)장의 흉상을 모신 곳은 KIST가 유일하다. 민간기업에서 창업주의 흉상ㆍ동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은 흔하지만, 대통령도 아닌 일개 관료의 동상이 모셔지는 건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드문 일이다. 연예인을 제외하곤 영웅도 스타도 거부하는 나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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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섭은 누구일까. 과학기술계에선 그를 모르는 사람이 ‘간첩’일테지만, 일반인들에겐 여전히 낯선 인물이다.  한국 과학기술계에서 그는 ‘아버지’쯤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6.25 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가발공장과 라디오조립, 시발택시가 기술의 전부이던 시절, 바닥에서부터 연구ㆍ개발(R&D)의 터를 닦고 쌓아올린 이가 바로 최형섭이다.

지난 2일 서울 홍릉 KIST에선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최형섭 박사 탄신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였다. 이날 행사에는 문만용 전북대 교수의 ‘한국 과학기술의 설계자, 최형섭 박사’ 발제를 시작으로,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의 ‘최형섭 박사의 리더십과 한국의 미래’라는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매년 최형섭 박사의 기일에 대전 현충원을 방문해, 무릎꿇고 참배를 드리는 각별한 인연을 가진 히라사와 료 도쿄대 명예교수도 영상을 통해 고인을 회고했다.

KIST는 1965년 한ㆍ미 정상회담 때 당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위해 준 선물이었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국군의 현대화와 경제원조를 해주겠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산업기술 지원이라는 당시 KIST의 설립 취지를 설정한 것도, 미국 등 선진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을 영입한 것도 최 박사가 주도한 일이었다. 이렇게 KIST에서 시작한 정부 출연연구소는 이후 전자통신연구원ㆍ화학연구원ㆍ생명공학연구원ㆍ기계연구원ㆍ생산기술연구원 등으로 가지를 치며 뻗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형섭 박사에게 보낸 편지. 60~70년대 한국과기계의 기틀을 세운데는 박정희와 최형섭 두 사람 모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사진 KIST]

박정희 대통령이 최형섭 박사에게 보낸 편지. 60~70년대 한국과기계의 기틀을 세운데는 박정희와 최형섭 두 사람 모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사진 KIST]

최형섭의 KIST는 민간기업에 R&D 기능이 전무하던 시절, 막힌 기술 혈맥을 뚫어줬다. 서울대 교수 연봉의 세 배는 물론, 대통령보다 더 많은 연봉을 약속하고 미국에서 인재를 모셔왔다.  그렇게 KIST를 거쳐간 박사들이 대학에도 자리잡으며 한국 이공계 교수들의 수준을 올려놨다. 지금이야 KAIST 교수가 중국의 인재영입 프로젝트인 ‘천인계획’에 꼬임을 당해 핵심기술을 유출하고,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지만, 그땐 미국에서 그런 KIST를 보고 ‘리버스 브레인 드레인’(Reverse Brain Drain:역(逆) 인재유출)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최형섭을 규정 짓는 몇 가지 단어가 있다. 대쪽ㆍ직언ㆍ소신…. 최 박사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1995) 곳곳에 그의 그런 일화가 뿌려져 있었다.

 ‘KIST 연구원의 봉급이 국립 대학교수 봉급의 3배 가까이 되었다. 대학에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제일 먼저 서울대 공대 학장이던 이량 박사가 나한테 쫓아와서 그 부당성을 거론하며,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라고까지 극언을 했다.…나는 이 박사한테 “다른 사람들이 받고 있는 봉급을 깎아 내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 봉급을 그러한 수준으로 올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소…”하고 되받아쳤다. 이 박사는 “정말로 당신 말이 옳은 것 같다”고 하면서 다시 봉급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56~57쪽)

‘연구원을 뽑은 뒤 또 한 차례 법 때문에 진통을 겪었다. 육성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골격이 전부 바뀌었는데, 그 중에는 연구계획 승인과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달려가 당장 개정해야겠다고 말하고는 1976년 3월 임시국회에 개정안을 냈다. …한참 실랑이를 하던 국회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우리가 무슨 과학기술을 아느냐. 소장이 그렇게 말하니 믿고 맡겨보자”고 해서 겨우 원안대로 통과됐다. ’(62쪽)

과거의 회고는 현재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은 “KIST법은 법이 통과하고 발효되기도 전에 개정된 역사상 유일한 법”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는데, 최 박사는 대통령에게 언제나 당당하게 건의했다”고 말했다.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은 “지금은 박정희처럼 과학을 중시하는 대통령도 없고, 최형섭처럼 권력자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관료도 없다”며 “자칫하다간 일본만큼 축적도 못하고 나쁜 것만 따라가다 쇠락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형섭 탄신 100주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ㆍ개발(R&D) 투자 세계 1위의 자랑스런 대한민국 과학기술계가 반세기 전 최형섭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최준호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joonho@joongang.co.kr

최형섭(1920~2004)

1920년 경남 진주 생

1944년 일본 와세다대 채광야금 학사
1955년 미국 노틀담대 물리야금학 석사
1958년 미네소타대 화학야금학 박사
1959~1961년 국산자동차 부사장
1962~1966년 원자력연구소 소장
1966~1971년 KIST 초대 소장
1971~1978년 과학기술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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