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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석류에다 밥 섞어 끼니 때운 미얀마 출신 산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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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15)

냉장고 프로젝트 차 조사하러 다니다가 문득 런던에 정착해 사는 선배의 출산 후기가 떠올랐다.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다.

“영국에서는 제왕절개보다 자연분만을 주로 하지. 미드와이프(midwife)라고 산모 옆에서 도와주는 간호인도 있어. 너라면 타국에서 혼자 출산하는 걸 상상할 수 있겠니? 남편(영국인)이 옆에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첫째 애 낳았을 때는 친정엄마도 오지 못하셨거든…. 더 서글픈 건 뭔지 아니? 아기를 겨우 힘들게 낳았더니 토스트랑 쿠키가 차랑 같이 나오는 거야. 그거 먹고 샤워하고 바로 퇴원하라지 뭐니(한국에서는 출산 후 바로 물로 샤워하지 않는다). 정말 황당하지?”

“네? 바로요? 누나 그럼 미역국은 먹었어요?” 나는 당황하며 물어봤었다.

“당연히 미역국 하나 끓여줄 사람도 없지. 그럴 줄 알고 미역국도 병원 가기 전에 내가 미리 만들었어. 남편이 보온병에 미역국을 담아 햇반이랑 가지고 왔는데, 글쎄 병원에서 산모 건강에 안 좋다고 전자레인지를 못 돌리게 하는 거야. 별수 없이 뜨거운 물 받아 미지근하게 데우는 수밖에 없었어. 정말 서럽더라고….”

우리나라에서 산모들이 챙겨 먹는 미역국. [중앙포토]

우리나라에서 산모들이 챙겨 먹는 미역국. [중앙포토]

선배의 일화와는 반대의 상황으로, 이번에는 국제결혼을 해 한국으로 들어온 신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먼 타국에서 와 임신하게 됐는데 음식이 맞지 않아서 입덧으로 심하게 고생했다고 한다.

한국 음식 냄새를 맡을 때마다 심하게 입덧했던 이도 있고, 그럴 때마다 엄마가 해주던 고향 음식을 그리던 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고향의 과일이 가장 생각났다고 했다. 새콤하고 씹는 맛이 좋은 열대 과일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고. 남편에게 말해도 구해줄 수 없었기에 더욱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는데, 대신 수입산 과일을 먹었지만, 본래의 맛도 나지 않고 가격만 비싸 미안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해 어느 미얀마 출신의 신부는 석류에다가 밥을 섞어 그것만 먹었다고 한다.

한 베트남 신부는 고향 특산물인 생선이 그리웠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생선이라 더욱 생각이 났단다. 베트남에서는 어종이 풍부해 똑같은 생선을 매끼 먹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만큼 생선이 다양하다는 뜻인데, 바닷고기와 민물고기를 다양하게 번갈아 먹던 사람이 한국에서 고등어, 연어, 갈치 정도만 먹다 보니 질릴 법도 하겠다.

이렇듯 산모를 보면 음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러시아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된 우리 고려인은, 바다가 없는 나라에서도 미역을 구해다가 몸 푸는 산부에게 미역국을 끓여주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른미역이나 다시마, 냉동 해산물을 구할 수 있었는데, 값이 비싸도 산부에게는 꼭 먹였다고 한다.

고려인의 미역국이 우리와 가장 큰 차이는 소고기가 아니라 돼지고기를 넣는다는 점이다. 돼지기름이 국물에 떠서 육안에 보일 정도다. 고려인이 돼지고기를 좋아해 넣는다는 말도 있고, 이북에서 먹던 방식이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해 어느 미얀마 출신의 신부는 석류에다가 밥을 섞어 그것만 먹었다고 한다. [사진 pixnio]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해 어느 미얀마 출신의 신부는 석류에다가 밥을 섞어 그것만 먹었다고 한다. [사진 pixnio]

고려인 연구의 전문가이자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의 김병학 관장에 의하면 1986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사고 이후 러시아 지역에서 미역 소비량이 갑자기 증가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미역은 고려인만 주로 먹었는데, 방사성 노출에 요오드 섭취가 중요하다고 하자 요오드가 풍부한 해조류를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고려인이 주로 먹는 미역채(매기채)가 알려졌다. 미역채는 미역 줄기를 잘게 찢어 샐러드처럼 먹는 것이다. 하지만 김 관장은 당시에는 다시마와 미역을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당시 고려인이 먹던 매기는 미역이 아닌 다시마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베트남에서도 우리의 미역국처럼 산모를 위한 특별 보양식이 있다. 말린 생선, 삶은 샬롯, 삶은 야채, 파파야 수프로 조리한 몽저(Móng giò, 돼지족발)를 먹는다. 돼지발을 푹 고아 국물까지 먹는 음식이다. 돼지 발에 들어있는 단백질이 모유의 질을 높여주고, 특히 모유의 분비를 촉진해준다고 한다.

나주에서 만난 베트남 신부도 아기를 낳았을 때 친정어머니가 한국까지 와 몽저를 해주셨다고 했다. 특별한 보양식 외에도 고향에서 보내주는 각종 소스와 면, 베트남 목이버섯과 죽순과 같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재료가 산모에게 큰 힘이 된다고 한다. 한국산 죽순이 있다고는 해도 고향에서 나는 것과는 맛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베트남에서 산모를 위한 특별 보양식은 말린 생선, 삶은 샬롯, 삶은 야채, 파파야 수프로 조리한 몽저(Móng giò, 돼지족발)이다. 사진은 한국식 돼지족발. [중앙포토]

베트남에서 산모를 위한 특별 보양식은 말린 생선, 삶은 샬롯, 삶은 야채, 파파야 수프로 조리한 몽저(Móng giò, 돼지족발)이다. 사진은 한국식 돼지족발. [중앙포토]

애타게 음식을 찾는 이가 비단 외국인 거주자뿐만 있겠는가.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배 속의 아기를 위해 철 지난 과일이나 식재료를 구하러 동분서주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제철 음식 맛을 올곧게 내는 건 불가능하겠으나, 그래도 냉동 시스템과 냉장고 덕분에 우리는 식재료를 장기간 보관하거나 수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산모를 위한 각양각색의 보양식이 정말 건강에 좋은지 과학적인 접근은 차치하더라도, 가장 필요할 때 먹어야 할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먹고 싶은 음식으로 만들어진 서운함은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다. 복숭아를 한겨울에 그렇게 찾으셨다는 장모의 한을 끝내 풀어주지 못하셨던 장인의 미안함이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복숭아 통조림은 복숭아가 아니었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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