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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월세 대란에 '소액연금' 담보로 보증금 대는 고령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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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주에 사는 김모(여·63)씨는 지난 5월 급하게 목돈이 필요했다. 치과 진료에서 11개의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했다. 견적이 2000만원가량 나왔다. 만 65세가 안 돼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김씨는 자금 마련을 고민하던 중 연금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실버론을 알게 됐다. 덕분에 500만원을 급하게 대출했다. 김씨는 “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안 됐는데 실버론으로 수술을 잘 끝낼 수 있었다”며 “매달 38만원가량 받는 연금에서 이자로 2만원 정도 빠지긴 하지만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금공단 실버론 1~9월 6029명 이용, 60%는 전·월세금으로

국민연금을 담보로 대출받는 고령층이 늘고 있다. 최대 1000만원까지 목돈을 빌려주는 국민연금의 실버론을 이용한 노인이 올해 6000명을 넘은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최근 전·월세 시장 불안 때문에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노후 밑천을 미리 당겨쓰고 있다. 소액연금에 미리 손을 대는 바람에 노후 빈곤 심화로 이어질 위험이 커졌다.

3일 국민연금공단 지난 2012년 5월 국민연금 실버론을 시행한 이후 지난 9월 말까지 모두 6만8088명이 3279억원을 빌렸다고 밝혔다. 올해는 1~9월 누적 인원이 6092명에 달한다. 이들에게 379억원이 지급됐다.

국민연금공단 종로중구지사 모습. 연합뉴스

국민연금공단 종로중구지사 모습. 연합뉴스

실버론은 만 60세 이상 국민연금 수급자가 목돈이 필요할 때 낮은 금리로 이용할 수 있는 대출 상품이다. 전·월세 자금, 의료비, 배우자 장례 보조비, 재해복구비 등이 필요할 때 1인당 최대 1000만원까지 빌릴 수 있다. 제도를 시작할 당시인 2012년에만 해도 한도가 500만원이었는데 2015년 750만원으로 오른 뒤 지난해 1000만원까지 늘었다.

연간 연금 수령액의 두 배 이내(최고 한도 1000만원)에서 빌릴 수 있다. 가령 대부를 신청할 당시 연금액이 한 달 50만원이라면 연간 수령액(600만원)의 두 배(1200만원)를 감안해 최고 금액인 1000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다. 다만 실제 의료비 등 소요액이 500만원이라면 1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해도 500만원만 지급된다. 전‧월세 보증금은 임차개시일 전후 3개월 또는 갱신계약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신청할 수 있다. 의료비는 진료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신청하면 된다. 신용등급이나 소득·재산과 상관없이 대부가 가능하며, 대부용도 별로 신청기한이 정해져 있다.

연금공단에 따르면 2012년부터 올해 9월까지 누적 이용자 10명 중 6명(60.2%)꼴인 4만985명은 전·월세 자금 마련에 돈을 썼다. 매년 이런 경향은 비슷하다. 올해 61.2%(3729명), 지난해 59.7%(5910명)가 전·월세금 마련 목적으로 실버론을 이용했다. 당장 전·월세 보증금이 부족해 미래 연금을 담보로 대출받는 셈이다. 전세 보증금이 필요한데 소득이 없어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은퇴자 수요가 몰리는 것으로 보인다. 집세를 제외하고 실버론의 38%가량은 의료비 용도 대출이다. 배우자의 장례비 등 용도가 1% 정도 된다.

연금공단에 따르면 이용자 66.8%는 신청 당일에 돈을 받았고 늦어도 신청 다음 날까지 대부분(94.7%) 받았다.

국민연금공단 종로중구지사 모습. 연합뉴스

국민연금공단 종로중구지사 모습. 연합뉴스

국민연금공단 연금급여실 관계자는 “미래에 연금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월세 자금이나 의료비 등 긴급자금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며 “전·월세 자금의 평균 임차보증금이 오르고 물가가 상승한 현실을 반영해 대출 한도를 올려왔다. 수요도 꾸준히 늘면서 시작 때와 달리 예산도 500억원 이상으로 올렸다”고 말했다.

실버론은 매년 배정된 예산을 모두 소진한다. 고령층의 급전 수요가 몰려 지난해에는 1년 치 예산이 반년 만에 고갈돼 추가 증액했다. 이렇게 연중에 예산이 소진돼 증액한 건 2015년과 2019년 두 차례다. 올해는 520억원이 책정됐고 9월 말 기준 70%가량 바닥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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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5년간 원금균등분할상환 조건으로 할 수 있는데 1~2년 거치를 희망하면 최대 7년까지 상환 기간을 늘릴 수 있다. 상환이라고 하지만 이용자의 대부분인 99.5%는 연금을 깎는 방식(연금공제)으로 갚는다. 2019년 기준 1인당 월평균 연금 수령액은 52만원 정도인데 실버론을 받은 사람들 대다수는 원금과 이자로 깎이는 액수가 월평균 8만~9만원 정도라고 한다. 이자율은 5년 만기 국고채권 수익률을 적용되며 올 4분기 기준으로는 연 1.12%가 적용된다. 국민연금만으로도 노후 대비가 충분치 않지만 이를 깎이면서까지 급전이 필요한 노인이 많다는 얘기다.

연금공단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상환 기일이 도래하지 않은 수급자 등을 제외한 대상자의 대출액 2247억원가량 가운데 99.35%인 2128억은 상환됐다.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전경. 연합뉴스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전경. 연합뉴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가입자 입장에서 노후 대비를 생각한다면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급할 때 빌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도 있다”며 “민영보험에서도 가입자의 경제 상황에 따라 납입료나 납입기간을 조절하는 등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신축적으로 운용한다. 국민연금도 연금기금을 활용해 이런 식으로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노인 빈곤 완화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단 우려도 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연금은 소득이 없을 때 임금을 보장하려는 것인데 이를 미리 당겨서 쓰게 되면 노후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노후 생활 보장이라는 국민연금의 근본 취지를 보면 이에 반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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