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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용 마약 3128개 타간 환자, 그는 이미 죽은 자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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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용 마약류 이미지. [뉴스1]

의료용 마약류 이미지. [뉴스1]

A씨는 지난해 4월과 6월 모 의원에서 할시온정 0.25mg씩을 처방받았다. 할시온정은 불면증 단기치료제다. 의료용 마약류로 분류된 약품이다. 반드시 전문 의료진의 판단 아래 적정량을 투입해야 한다. 오·남용 우려에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서다. 하지만 A씨는 처방 때 타인 명의를 썼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확인결과, 2007년 6월 숨진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타인 명의로 3128개 타내기도

병·의원에서 사망자의 명의를 도용해 의료용 마약류를 처방받는 사례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식약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2019년 병·의원 등에서 사망자 49명의 이름으로 154회 걸쳐 6033개의 의료용 마약류가 처방됐다.

처방 마약류는 정신안정제인 알프라졸람(정신안정제)이 2973개로 가장 많았다. 이어 졸피뎀(수면제) 941개, 클로나제팜(뇌전증치료제) 744개, 페티노정(식욕억제제) 486개 등 순이다. 알프라졸람과 졸피뎀·클로나제팜 등은 향정신성 의약품이다. 인체 중추신경계에 직접 작용한다. 오·남용할 경우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 약물이다. 일부 약물은 강력범죄에 악용돼 심각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오기도 했다는 게 강 의원의 설명이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시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시스

식약처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한 사람이 1년간 여러 의원을 옮겨 다니며 사망자 명의로 30회에 걸쳐 모두 3128개에 달하는 의료용 마약류를 얻은 사례도 있다. 치료 목적이 의심되나 제재는 없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현행 국민건강보험 수진자 조회시스템의 문제다. ‘사망자’와 ‘자격상실인’을 구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병·의원 진료 때 사망자 성명·주민번호를 제시해도 건보 수진자 시스템상 사망 여부가 표시되지 않는다. 자격상실인으로만 나온다. 더욱이 의료기관에서 반드시 본인 확인을 거치도록 하는 의무 조항은 없다. 명의 도용자는 계산 때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않겠다”고 한 뒤 약값을 더 주면 그만이다.

강병원 의원은 “사망신고 후 12년이나 지난 사람의 이름으로 의료용 마약류 처방이 가능한 건 건강보험 수진자 조회 시스템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이라며 “처방된 의료용 마약류는 범죄 등 다른 목적에 악용되었을 소지가 다분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건강보험 수진자 조회 시스템에 별도코드를 넣어 사망자나 장기체납자, 이민자 등으로 분류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며 “건보와 식약처 등이 수진자 조회 시스템을 즉각 개편해 사망자 명의로 이뤄지는 진료, 처방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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